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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달호 Oct 22. 2018

생리대 고르는 남자

"딸들이 어깨를 쭉 펴는 세상이었으면 좋겠어요"

남자가 편의점을 처음 운영하며 겪는 난감한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는 생리대를 발주하는 일이다. 맥주에 라거, 에일, 람빅 같은 종류가 있는 것처럼 생리대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사실은 알겠다. 그런데 그것들은 서로 어떻게 다른 것이며, 어떤 제품을 얼마만큼 갖다 놓으면 되는 것인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울트라 날개? 생리대에 날개가 달렸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오버 나이트는 또 뭐야? 밤새도록 착용하는 것인가? 팬티라이너는? 이런 것들을 대놓고 물어볼 사람이 주위에 없어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생리대뿐인가. 스타킹도 몰랐다. 밴드 스타킹, 팬티스타킹, 판탈롱 스타킹의 차이는 제품 포장지에 있는 날씬한 모델들의 사진을 보면 대충 알겠는데, 대체 어떤 제품과 색상을 어느 정도 갖다놓아야 하는지 역시 가늠이 되지 않았다. 거기다 누드 토우, 압박 스타킹, 풋 커버, 기모 같은 희한한 이름의 스타킹들이 많은데 좁은 매장에 모든 종류를 구비할 수는 없고, 얼마만큼 구색을 갖춰야 하는지도 몰라 암흑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생리대를 모르던 시절의 흑역사. 발주할 때마다 어둠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편의점 6년 차가 된 지금은 여성 용품을 쫙 꿰고 있다. ‘남자치고는’ 그렇다는 말이다. 여러 생리대의 차이점은 물론이고, 특정 연령대 여성이 주로 어떤 브랜드 제품을 좋아하는지도 알게 됐고, 편의점에서 여성들이 급하게 찾는 물건이 무엇인지, 어떤 상황에서 그런 제품을 찾는 것인지 그 이유까지 대충 짐작한다. 딸아이에게 “너 생리대 그거 쓰니? 요즘 P사에서 새로 나온 제품 인기 좋더라” 하고 권할 정도다. 아빠와 딸의 대화 소재로는 꽤나 독특하다.


남자가 편의점을 운영하면서 약간 불리한 점 가운데 하나는 생리대를 판매할 때다. 일부 여성 손님은 생리대를 구입하면서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숨기듯 후다닥 가방에 집어넣는다. 한번은 여자 손님 한 명이 편의점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카운터에 내가 있으니 들어오지 않다가 여자 알바가 등장하니 그때서야 매장에 들어와 생리대를 구입했다. “굳이 저럴 필요까지 있나요?”라고 알바에게 물으니 “좀 민감한 사람들이 있긴 해요”라며 빙그레 웃는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안 그런다는데 우리 편의점은 오피스 건물에 입점해 있어서 그런지 조금 나이가 있는 여자 손님들은 생리대를 사면서 꽤나 조심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평소에 나는 계산을 하면서 손님과 눈을 마주치려 최대한 노력하는데 생리대를 구입하는 손님만큼은 예외다. 손님이 생리대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으면 부러 먼 산을 바라보며, 딴청을 부리며, 살짝 뻘쭘한 분위기에서 계산 절차가 이어진다. 3초가 3분 같다. “봉지 드릴까요?”라고 굳이 묻지도 않고 곧바로 봉지에 집어넣는다. 그것도 반드시 검정 비닐봉지에.


물론 나는 생리를 해본 적이 없고, 여성들이 생리할 때 기분과 감정에 대해 그다지 알지 못한다. 다만 여성의 생리가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숭고한 현상이라는 상식쯤은 당연히 알고 있다. 상식이 당당한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생리대를 사는 일이든, 생리휴가를 내는 일이든, 혹은 생리 결석을 하는 일이든 딸들이 어깨를 쭉 펴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편의점을 운영하며 새삼 느끼는 작은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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