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극의 끝에는.
"지난 2주일 동안 어떠셨습니까?"
"바빠서 불안이나 우울을 느낄 틈새도 없었어요. 공황도 오지 않았고요."
몇 번의 실패 끝에 처음으로 만났던, 지금 의사 선생님을 기억한다. 흰머리에 머리가 벗겨진 노교수는 반듯한 자세에 키보드보다는 수필로 적는 걸 선호했으며 네모난 안경을 쓰이고 있고, 사계절 내내 항상 하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대학교수였다가 은퇴해서 개업했다는 그 선생님은 내 잔꾀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그 바닥에선 이미 베테랑이었다.
"가진 증상에 비해 웃는 걸 보니 밝아 보여요."
"오늘은 좀 망설이네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솔직히 말해봐요."
그러니까 어릴 적에는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그런 류의 사람이었다.
지금보다 더 어릴 적, 4년 간의 학교폭력으로 인해서 고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더는 평온한 매일을 바라지 않게 됐다. 만일 다시 한번 학교폭력이 나를 덮친다고 한들 나도 온 힘을 다해 저항할 생각이었다. 교실에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건 오로지 나뿐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전에 나는 스스로 익살맞은 연기를 해가면서 '학교폭력 생존자'가 아니라 '밝고 활발하고 할 말이 있을 땐 하는' 그런 나를 연기했다. 속은 스트레스성 위장염과 생리불순으로 썩어가고 있는데도 그렇지 않은 척했다. 내 이야기 같은 건 모두들 관심 없다고, 어차피 다들 내 얘기를 듣는 것보다 자기 시간이 더 귀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내 과거를 알고 있는 걸까. 그럴리는 없을 텐데. 내가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고 있단 걸 눈치챘었나. 그게 아니면 내가 웃지 않은 적이 있었나.
별생각 없이 한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진심으로 당황해서 무어라 반응하지 못했다. 그 친구는 평상시에 별말 없이 나를 조용히 지켜보던 친구였다. 적극적으로 대화에 끼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관찰자적인 시점에서 나를 보고 파악해 냈다.
다른 한 명은 사람 보는 눈 자체가 좋았다. 그 친구는 재학할 당시, 고등학교의 부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저 선생님은 지금 상태가 안 좋아 보이니 말 안거는 게 좋을 것 같다'던가, '저 선생님의 성향은 이럴 것이다'는 식으로 말했는데 대부분 그게 맞았다. 그 화살은 나한테도 돌아왔다.
10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봤을 때, 싸워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첫 번째 친구처럼 나를 관찰하고 어딘가 위화감이 드는 부분에서 내가 연기를 하고 있단 걸 알아챈 거겠지. 정확한 이유를 댈 수 없는 건, 그 친구들이 내 속을 파악했다는 걸 알아채자마자 전부 다 잘라냈기 때문이다.
마치 가위로 오려낸 것처럼 그 뒤로 그 친구들과 만나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이기적인 선택이란 생각이 들지만 어린 내겐 어쩔 수 없던 선택이었다. 교실 카르텔에 최하위로 노출이 되고 나서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까. 만일 내가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 친구들을 마주할 수 있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럴 리는 없을 것 같았다.
4년 간의 트라우마는 뼛속까지 깊게 침투해서 성인이 되고 나서도 나를 힘들게 했으니까.
하지만 그때보다 한 발자국 나아진 것이 있다면, 정신과 의사 선생님께는 솔직하게 내 증상이나 지난 일상을 털어놓고 감정을 말할 수 있게 됐다. 공황장애라는 친구 덕분에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 공황장애는 내게 '더 이상 참지 말고 말해라'라고 말하고 싶었던 어린 내가 아니었을까.
덕분에 나는 오늘도 진찰실에 가는게 두렵지 않게 됐다.
사진 출처 : pixabay, GladisAbr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