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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누나 Feb 23. 2020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부끄러움

손들고 나간 반장선거에 낙선한 일. 아버지인 줄 알고 장난치느라 발을 꾹 밟았던 나무 뒤의 남자가 생판 모르는 사람이었던 일. 전에 다니던 학교의 반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모두들 보고 싶어, 누구누구만 빼고."라고 나한테 못되게 굴었던 친구 이름을 썼던 일. 소변을 오래 참으며 집으로 오다가 끝내 잠긴 현관문 앞에서 주저앉아버렸던 일. 멀리 사는 친구를 생일잔치에 초대하는 카드를 썼지만 거절당했던 일. 수업에 빠진 친구가 걱정되어 집으로 찾아가 의도치 않게 소동이 되었는데 정작 친구는 다른 데 있던 일.


학교 고시반에서 출석 불량자 명단에 올라 게시판에 이름이 붙었던 일. 보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메시지를 보낸 일. 한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못된 이야길 쏟아부어 소중한 사람과 멀어져 버린 일. 술을 진탕 마시고 휴대전화를 잃어버려 여러 사람에게 연락이 가도록 만든 일.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구질구질하게 매달린 일. 시험 성적을 다시 살펴달라고 교수님 연구실에 찾아갔던 일. 스스로를 표창장 수여 대상자로 추천하는 서류를 들고 주무 부서를 찾아갔다가 "직접 오신 거예요?"하는 이야길 들은 일.


이에 립스틱이 묻은걸, 고춧가루가 낀 걸 모르고 웃고 떠들다 집에 와서야 알게 된 일. 한참 전화 통화를 하다가 느낌이 이상해 화면을 보니 동명이인인 다른 사람이던 일. 내일 날짜로 잘못 예매한 걸 모르고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자리를 비켜준 일. 예기치 않은 폭우에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무릎에 피를 흘리며 걱정 어린 시선 속에 집으로 돌아온 일. 숙취에 시달리는 푸석푸석한 얼굴로 좋아하는 사람을 마주친 일. 용기를 끌어모아 보낸 편지에(메시지에) 답이 오지 않아 배달사고를(서버 불통을) 의심했던 일.




최근에 "속옷, 어디서 사요?" 하고 물어본 사람이 있다. 최근에 속옷을 언제 어디서 샀던가. "그때그때, 인터넷에서요. 와이어 없는 거. 인터넷에서 사는 게 편하고 종류도 많으니까. 예쁜 것보단 편한 게 최고죠." "아, 정말? 저는 속옷은 신경 써서 입는 편이에요. 아래위를 맞춰서. 왜, 갑자기 쓰러져서 구급차에 실려가게 됐는데 윗옷을 찢어버려야 할 경우가 생길 수 있잖아요. 그럴 때 낡은 속옷을 짝짝이로 입고 있으면 엄청 부끄러울 것 같아요." 그렇구나. 나로서는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부끄러움의 포인트였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영양제를 한 박스 가득 주문했다. 구급 대원에게 속옷을 보이게 되는 일이 나에게는 있을법하지 않아서다. 나는 비틀비틀 휘청휘청하다가 마침내 벽을 짚고서 깊은숨을 내쉬고는 잔뜩 인상을 쓴 채로 다시 일어날 것 같다. 앞서 이야기의 인물도 무척 튼튼하고 건강한 사람이라 좀체 구급차의 신세를 지게 될 일은 없어 보이지만, 부끄러움이란 어쨌거나 '두 번은 없으면 좋을 일'과 '한 번이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일'의 합집합이니 이해할 수 있다.


사는 내내 '두 번은 없으면 좋을 일'은 세 번도 네 번도 벌어질 테고, '한 번이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일' 역시 목록에서 하나 둘 늘어갈 게 틀림없다. 그러는 동안 끊길 듯 끊기지 않고 밀려드는 부끄러움의 파도는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채근하겠지. 상한 곳은 씻겨 건강하게 아물고, 밉고 모난 구석은 닳아 매끈해지도록 온전히 견뎌내고 싶다.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알아서 다행이다. 우리가 가진 게 자기혐오나 괴로움, 미움, 열등감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라 다행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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