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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화 Jan 30. 2022

강가에 아스라이 번지는 연둣빛

봄날, 다산 길을 걷다

 

마음속에 오래 품고 사는 풍경이 있다. 가을빛 물든 저녁 강가의 능내. 빛나던 시절에 좋은 사람과 함께 나룻배를 탔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길을 나섰다. 봄비 촉촉이 내리는 아침의 그곳은 어떻게 다가올까?     

 이제는 기차가 서지 않는 능내역. 아직 남아있는 선로 옆엔 연분홍 벚꽃이 환했다. 조그마한 역사 안 구석에는 통기타가 놓여 있고 흑백사진들이 벽에 걸려있었다. 능내역은 폐역이 되었지만 기념관으로 남아있어 그리움을 찾아 나선 사람들을 맞아주고 있다.     

 역 앞의 기찻길을 건너 마재성지를 거쳐 길 따라 걸으니 벚꽃 잎들이 흩날렸다. 작은 항아리들이 놓여 진 돌담 위에도, 순하게 생긴 흰색 강아지의 집 위에도 연분홍 꽃잎들이 내려 앉아 있었다. 실학박물관 뒤편에는 너른 한강이 펼쳐져 있었다. 강 건너편 산에는 연둣빛이 아스라이 번지고 있었다.      

 예전에 보트를 탔던 곳은 어디쯤이었을까?” 

 강폭이 넓지 않은 곳이었다.1982년,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 교사가 된 다음해였다. 오후에 교무실로 걸려온 K의 전화를 받았다. 갓 제대를 한 그는 시외버스를 타고 능내로 가자고 했다. 저녁 무렵, 보트를 탔을 때는 주변에 사람들이 없었다. 아직 머리가 짧았던 그는 열심히 노를 저었고 둘이 무슨 노래를 불렀던 것 같다. 보트에서 내려서 저녁을 먹게 된 곳은 일반 농가였다. 방 안으로 동그란 상이 차려져 나왔고 추석 무렵이어서 송편도 놓여 있었다. 오랜만의 만남이어서 어색하기도 했다.      

 그를 처음 만난건 대학교 1학년 때 연합동아리 수련회에서였다. 50여명이 잔디밭에 둘러앉았을 때, 여대를 다녔던 나는 한 남학생에게 시선이 갔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했다. 1박2일의 일정이 끝나고 돌아오는 기차에서 서로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들었던 이유였다. 그 후로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그는 연상의 여자 친구에 대해서 말했고 나 역시 미팅한 이야기를 했다. 둘 사이가 애매하게 된 때는 그가 군대 가기 며칠 전이었다. 그는 내게 ‘너무 솔직하다’고 했다.  나는 그를 친구처럼 대했는데 그는 나를 매력 없는 여자로 봤나 싶어서 자존심이 상했다.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생각했고 입대 직전 연락이 왔지만 안 나갔다. 군대에서 편지가 왔어도 답장을 안했다.       

 시간이 지나니 상황들은 조금씩 바뀌어 있었다. 그는 군대있을 때 여자 친구가 시집을 갔다고 했다. 나는 뒤늦은 여드름 때문에 예민했는데 그가 대학교 1학년 때 모습으로 나를 기억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편했다. 어정쩡했던 친구사이에서 연인이 되었다. 그는 복학을 했고 취업준비를 하다 동갑인 내게 결혼까지는 부담을 느꼈는지 결별을 선언했다. 인연이 아닌가 싶었는데 우연히 두 번 마주쳤다. 한번은 길에서, 한번은 친구 만나러 간 대학 도서실에서.      

 헤어지고 1년후 쯤 전화가 왔다. 만나고 싶다고. 나는 ‘뭐야?’하면서 나갔고 그 후에 둘은 서로 맞추어 나가려고 노력했다. 27세 가을, 나는 친구들 중에서 가장 늦게, 그는 친구들 중에서 가장 빨리 결혼을 했다.      

 내 남편이 된 K와 살며 30여년이 흘렀다. 맞벌이를 하며 세 자녀를 키운 일상들. 부딪힌 적도 있지만 조화를 이루어 나갔다. 두 딸은 내가 결혼했던 나이를 훌쩍 넘겼고 아들은 군대를 갔다 왔다. 그동안 시간은 강물처럼 쉼 없이 흘렀다.     

 다산길은 산길로 접어들어 구불구불 이어졌다. 산과 강과 평야가 어우러진 곳에 이르자 멀리 토끼 섬이 보였다. 아직 남아있는 분홍 진달래 사이로 강가의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은 폭이 좁아지고 강기슭에는 빨간색 파란색 지붕의 집들이 평화롭게 자리 잡고 있었다. 기억 속의 장소는 거기쯤이었던 것 같았다. 예전의 농가 느낌을 주는 집들은 거의 개조된 듯 했다. 강기슭에 하늘색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보트가 놓여 있었다.


 왜 그동안 한 번도 다시 찾지 않았을까? 올 마음이 있었다면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 일부러 오게 되지는 않았다. 젊은 시절의 좋은 이미지를 그대로 마음속에 간직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능내를 다시 찾게 돼서 다행이었다. 다산 길 2코스를 다음에는 시점에서 종점 방향으로 다시 걷고 싶다. 남편과 함께 와서 보트 탔던 곳을 되짚어 찾다보면 마주보며 피식 웃을 것 같다. 계절은 돌고 시간은 흐른다. 강물 따라 새로운 추억들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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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내역은 중앙선 연장으로 운길산역이 생기며 2008년 폐역이 되었다. 

강변을 따라 3.4Km정도 걷는 다산 길 2코스는 부담 없이 산책하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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