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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화 Feb 01. 2022

혼자 여행을 꿈꾸며          

나 홀로 청산도 여행


 아침에 아파트 부엌 베란다 밖을 보니 벚꽃 잎이 바람에 휘날렸다. 4월 중순. 봄이 가고 있었다. 근처 학교 스피커에서 들리던 피아노 소리는 어느 순간 끊기고 수업벨 소리가 들렸다. 시간은 서서히 흐르고 비슷한 상황은 조금씩 달라져 가고 있었다. 32년간의 교직생활을 마치고 2년이 흘렀다. 직장을 그만두고도 시간에 끌려간 것은 아니었는지. 새로운 곳에 가서 익숙했던 생활에서 잠시 벗어나 본다면 나를 둘러싼 것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갑자기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생활의 틀에서 벗어나면 가장 하고 싶은 것이 혼자 여행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만의 여행을 꿈꾸었으면서도 언젠가로 미루고만 있었으니 그때 꾸었던 꿈은 현실도피의 수단이었을까?      

 혼자 여행을 한다면 처음으로 가보고 싶은 곳은 청산도였다. 노란 유채꽃이 피어있는 슬로우 섬 청산도. 혼자 못 떠났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남의 시선? 두려움? 저녁에 남편에게 말했다. 혼자 떠나보겠다고. 남편은 기꺼이 동의해 주었다. 오가는데 반나절씩 걸리므로 2박3일 일정을 잡았다.      

 강남 버스 터미널에서 5시간 걸려 완도에 도착했고 연안여객선 터미널에서 배로 50분을 가니 청산항에 이르렀다. 숙소를 향해 걸어가는데 바닷가에 설치된 구조물위에는 달팽이 모형이 있었고 ‘느림의 종’이 매달려 있었다. 자유로운 기분으로 종을 당겨보았다. 생각보다 크게 난 종소리와 함께 여행은 시작되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카메라를 챙겨 당리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길 오른편으로 부드럽게 만을 형성해 밀고 들어온 바다는 잔잔하고 고요했다. 머릿속에 상상해 왔던 청산도의 봄이 눈앞에 펼쳐졌다. 구불구불 이어진 길 양 옆으로 조성된 유채꽃밭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아무 생각도 안 났고 그저 노란색으로 펼쳐진 완벽한 세상과 하나가 되어 셔터를 눌렀다. 점점 햇빛이 사그라져 가는 것이 아쉬워서 다음날 아침에 같은 장소에 다시 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리입구로 올라가니 늦은 시간이었지만 ‘봄의 왈츠’ 세트장 앞 꽃밭 사이에는 울긋불긋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많았다. 그 부근은 영화 ‘서편제’와 드라마 ‘여인의 향기’, ‘피노키오’의 촬영지이기도 했다. 풍광이 아름다워서 여러 작품을 촬영했던 것 같다. 같은 장소라도 어떤 스토리와 연결되면 더 의미있는 곳으로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아 인적이 끊겨 아무도 없었고 문득 눈길을 돌리니 바다는 푸른빛을 띄고 있었다. 포구 근처 민가의 불빛이 하나 둘 늘어나서 물위에 주황색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사방은 고즈넉해졌고 어둠이 내려앉는 마을 풍경은 푸근했다. 밤바다의 공기를 맡으며 숙소로 돌아오는 길도 아늑하게 여겨져서 무섭지 않았다.      

 내일을 위해서 잠자리에 들며 몇 시에 시계를 맞출지 고민을 했다. 일찍 일어나 많은 것을 봐야겠다는 욕심도 들었지만 슬로길을 걸으러 왔기에 여유를 부려도 좋을 듯싶었다. 알람을 안 맞추고 자면 몇 시에 일어나게 될까 생각하면서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도락리 안길을 거쳐 전 날 갔던 곳으로 걸어갔다. 골목 담장에 벽화가 그려져 있고 시간과 관련된 문구들이 적혀 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공평한 자본금이다. 이 자본을 잘 이용한 사람이 승리한다.-아뷰난드’, ‘오늘이라는 것은 다시 오지 않는다.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단테‘ 

 시간이란 무엇인가? 한없이 길게도 또는 아주 짧게도 여겨지는 시간이라는 개념. 예전에 메모해 놓았던 글귀도 생각났다. ‘소중한 것을 먼저 하세요. 시간은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인생 2막을 어떻게 보내야할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듯도 싶었다.      

 동구정 우물을 지나 당리 입구 언덕을 향해 걸었다. 햇빛은 계절에 따라, 하루의 시점에 따라 차이가 있다. 아득하게 번지는 오전의 햇빛을 받은 노오란 유채꽃 밭이 꿈결 같았다. 소 한마리가 풀을 뜯고 있었다. 잠시 후 소의 주인이 오더니 소를 몰고 유채꽃밭 사잇길을 내려왔다. 길에 아무도 없을 때 사진을 찍으려고 서둘러 온 것인데 사람이 소를 끌고 가는 모습이나 누군가 걸어가는 뒷모습이 있는 길이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은 누군가 걸어갈 때 더 의미가 있나 보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니 유채꽃을 배경으로 나지막한 산과 푸른 바다와 하늘이 어우러진 그 곳은 아기자기하고 정겨웠다.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해변이 많다지만 청산도의 봄 풍경은 많은 외국인들이 와서 봐도 손색이 없는 동양의 미를 지닌 바다로 여겨졌다.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순환버스를 타고 ‘범바위’와 ‘느린섬 여행학교’, ‘구들장 논’을 둘러봤다. 기사아저씨가 “청산도에서는 급해도 뛰지 말라”고 하셨다. ‘청산도는 쉼표다’라는 표어가 곳곳에 있지만 시간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마냥 여유로울 수만은 없었다. 그래도 되도록 천천히 걷는 혼자만의 청산도 여행을 통해 스스로 만드는 습관적인 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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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는 2011년 ‘세계슬로길 제 1호’로 지정되었다.  미국 CNN방송이 선정한 ‘한국에서 아름답고 가보야 할 50곳’ 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청산도의 슬로길은 모두 11코스이다.  ‘구들장 논’은 구들장을 놓듯 돌을 쌓아 바닥을 만들고 그 위에 진흙을 얹은 후 흙을 부어 다져서 논을 만든 것이다. 청산도의 구들장 논은 2014년에 ‘세계 농업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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