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식은 힘이 있다
현지 식을 되도록 먹으려했지만 5일 만에 한계에 다다랐다. 매운 김치찌개가 너무 그리워졌다. 점심은 스시 집에서 김밥과 초밥을 먹었는데 차갑고 밍밍해서 속이 느글거렸다. 저녁 식사할 곳을 찾다가 청사초롱이 입구에 달린 한국음식점 '나야'를 발견했다. 규모는 작지만 깔끔하고 친절한 곳이었다. 컵라면과 비빔밥과 떡볶이, 김치를 먹고 정서가 안정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말로 반겨주고 맛있는 한국음식을 제공해주신 주인아줌마가 고마웠다. 아무리 맛있다는 현지식이 있어도 고향의 맛을 떠나서는 버티기 어려운 것 같다.
식당 내에는 외국인들도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한국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출장 온 남녀 젊은이 세 명을 만나서 반가웠다. 멀리 와서 열심히 일을 하고 휴식을 하는 젊은 사람들을 보니 멋있어 보였다.
“자유여행하시는 거 에요?”
그 쪽에서는 우리 일정을 물어보더니 나이 들어 여유롭게 여행하는 것을 부러워했다.
2. 엑상프로방스 이틀째-호텔 드 꼬몽
엑상프로방스 이틀째. 아침에 바람이 세게 불었다. 거리에는 두툼한 옷들을 입은 사람들도 많았다. 프랑스 곳곳에 있는 빵집 PAUL이 숙소 근처에 있어서 바게트와 커피로 아침끼니를 해결했다. 렌트한 차를 세워두고 하루 동안 걸어서 도시를 다니기로 했다. 혜진 아빠, 엄마와는 따로 다니다 저녁에 만나기로 했다. 서로 취향과 식성이 다를 수 있으니 가끔은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방법도 필요할 것 같았다.
아비뇽에 머물 때는 중심지인 교황청 앞을 여러 번 왔다 갔다 했는데 엑상프로방스에서는 미라보 거리를 자주 오가게 됐다. 미라보 광장 초입에 전날 스쳤던 세잔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모자를 쓰고 수염을 길렀으며 화구를 챙겨 짊어지고 지팡이를 짚은 형상이다. 아틀리에를 보고 와서인지 그 모습에서 화가로서의 성실함이 짙게 느껴졌다. 기념사진을 한 컷 찍고 꼬몽 예술센터로 갔다.
호텔 드 꼬몽(HOTEL DE COMONT)은 연중 2번의 특별전을 연다. 마침 세잔,고흐, 고갱, 모네, 피카소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좋은 작품들을 알차게 관람했다. '구겐하임 컬렉션' 입장료는 14유로였다. 호텔 드 꼬몽은 보수를 거친 18세기 건물인데 맨션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렸다. 귀족의 응접실 같은 실내인테리어가 놀랍도록 화려했다.
전시장에는 커다란 흑백사진이 걸려있었는데 피카소가 THANNHAUSER 부부에게 자신의 그림을 선물하며 기념으로 찍은 거였다. 타나우저는 자신이 소장했던 피카소 작품들을 비롯한 많은 명화들을 구겐하임재단에 기증했다. 이번 전시작들은 그가 소장했던 작품들이었다. 자신의 귀한 재산을 사후에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기증한 결단이 대단하게 여겨졌다. 화가 들 마다의 개성들이 드러난 훌륭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2. 그라네 미술관
그라네 미술관은 14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회화, 조각, 고고학 자료 등이 소장된 미술관이다. 17세기에 세워진 몰타 기사단의 수도원을 전시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전시장 입구에는 현대미술가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토요일이어서인지 다양한 연령대의 많은 관람객들이 작품을 감상했다. 세련된 옷차림을 한 프랑스 사람들의 진지한 관람태도에서 예술에 대한 관심이 느껴졌다. 램브란트, 앵그르, 세잔의 다양한 작품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엑상프로방스가 고향인 세잔의 작품들이 많았다. 생트 빅투아르 산, 목욕하는 사람들, 에밀 졸라의 초상, 세잔 부인, 정물화 등을 직접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라네 미술관 입장료는 8유로였는데 한군데를 더 볼 수 있었다. 입장권에 그려진 약도를 보고 근처의 전시관으로 걸어갔다. ‘회개자들을 위한 예배당’(1654)을 개조한 건물에 장 ‘플랑크’의 소장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모네. 반 고흐. 피카소 등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모네와 세잔은 프랑스 출신이지만 고흐는 네덜란드인이고 피카소는 스페인 사람이다. 그들의 개인적인 환경은 달랐지만 19세기 후반 이후 프랑스에서 서로 영향을 받으며 활동했다는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피카소는 노년에 생 빅투아르 산근처의 보브나르그 성에서 거주한 적도 있다고 하니 엑상프로방스와는 연관이 있다.
그라네 미술관을 나오니 비가 내렸다. 남프랑스는 항상 따뜻한 햇빛만 내리쬘 것 같은 상상을 했는데 서늘한 분위기였다. 남편과 우산을 하나씩 사서 미라보 거리 쪽으로 걸어갔다. 엑상프로방스는 곳곳에 분수들이 많았다.
상가들이 늘어선 번화가 쪽으로 들어서는 초입의 한 구석을 살펴보게 되었다. 첫날 도착했을 때부터 몇 번씩 오갈 때마다 눈에 띄었던 노숙인이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이었다. 벗겨진 머리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자국이 있는 덩치 큰 노숙자는 언제나 한편에 누워서 자리를 지켰다. 비가 쏟아지니 자리를 피했을까 싶었는데 천막 같은 비닐이 보였고 그 밑으로 슬리핑백에 들어가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나중에 엑상프로방스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름다운 건축물이나 유명한 미술품보다 그 노숙자가 생각날 것 같았다.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살고 싶어한다는 엑상프로방스. 많은 인파가 다니고 야외 테라스에서는 풍요롭게 먹고 마시는 중에 전혀 딴 세상 같은 광경이었다.
중심가를 여러 번 오가니 익숙한 듯 하면서도 골목이 헷갈렸다. 전날 갔던 한국음식점 '나야'를 찾아서 빙글빙글 주변을 몇 번 돌다가 겨우 찾았다. 컵라면과 김밥으로 점심을 먹으며 다행이라 여겨졌다.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만 문을 연다니 한 번 더 오길 잘 해서였다. 현지인들도 김치까지 챙겨가며 맛있게 먹는 모습이 좋아보였다.
화려한 잎사귀 모양의 달콤한 디저트인 칼리송을 파는 집이 눈에 띄어 들어갔다. 칼리송은 ‘달콤한 포옹’이라는 뜻으로 아몬드가루와 설탕에 절인 멜론, 오렌지 등을 섞어서 틀에 넣어 굽지 않고 만들어낸 과자다. 설탕으로 만든 얇은 층이 있어 달콤하고 존득한 식감이 있는 부분은 고소하다. 가격은 비싼 편이었지만 엑상프로방스의 특산품이어서 자녀들을 생각하며 선물용으로 구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