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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화 Aug 27. 2022

미루나무가 있는 풍경

자라섬의 여름


경춘선은 오래 묵혀둔 일기장 같은 존재다. 장롱 속 일기들은 그 자리에 있어 안심이 된다. 잘 꺼내 보지는 않지만 읽기 시작하면 예전 추억을 소환할 수 있다. 춘천 행 기차도 언젠가 마음먹고 타보면 지난 시간의 풋풋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1970년대 후반 대학 시절, 기차를 타고 마석으로 연합 동아리 MT를 갔다. 새로운 만남에 들떠 좁은 공간도 불편한 줄 몰랐고 밤을 새워도 피곤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강촌으로 캠핑을 간 적도 있었다. 물가에 옹기종기 모여 서툴게  코펠에다 밥을 해먹었다. 강물에 반사되어 반짝이며 부숴 지는 햇살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했다.      

  경춘선이 전철화 되면서 마음만 먹으면 쉽게 탈 수 있지만 미루고만 있었다. 예전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무더위로 인해 밖에 잘 안 나가게 되는 한여름. 움직이면 땀이 나니 몸을 사렸다. 코로나 사태로 마스크를 써야 해서 외출이 고통이었다. 해마다 찬바람이 나면 극도의 더위마저도 즐길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더위의 한복판에 있을 때는 어서 지나가기만 바라게 되었다. 그때는 모른다. 지나가면 좋은 것만 기억에 남게 된다. 후회를 줄이려고 더위와 맞서서 뙤약볕 속으로 나가 보기로 했다. 경춘선 전철을 타고 자라섬으로 갔다.   

   

  섬으로 들어서는 길목의 작은 다리 위에 돌로 된 작은 자라상이 앙증맞았다. 여러 나라들의 글자를 조합해 환영의 메시지를 담은 자라형태의 커다란 조형물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왜 섬의 이름이 자라섬인지 궁금해졌다. 1986년 가평군에서 지명위원회를 열어 자라섬이라고 명명하게 되었는데 섬의 형상이 자라를 닮은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자라섬은 서도, 중도, 남도, 동도의 길쭉한 네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도를 걸으며, 건너편 강가에 펼쳐지는 미루나무가 늘어선 풍경을 만났다. 먼 산은 서늘한 푸른빛을 띄었고 나무들의 녹색은 다양했다. 오전의 생기 있는 햇빛을 받은 나무들은 미묘한 농담 차이로  물 번짐이 자연스러운 수채화 같은 풍경을 만들었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 걸려있네, 솔바람이 몰고 와서 살짝 걸쳐놓고 갔어요’

  미루나무를 보면 ‘흰구름’이라는 동요가 떠올랐다. 그 나무들이 늘어선 풍경을 보고 자란 건 아니지만 노래를 듣고 많이 상상을 해서인지 곧고 길게 뻗은 나무들에게 친근감이 들었다. ‘미국에서 들어온 버드나무’라는 뜻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토종 나무처럼 편안하게 다가왔다.     

  

  서도에서 중도로 연결된 길에는 강가를 따라 노란색 금잔화와 붉은 색의 황화코스모스, 흰색 안개꽃들이 피어있었다. 멀리 보이는 철교 위로 기차가 지나갔다. 서도에서 봤던 미루나무들이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키가 큰 나무들 아래 서니 눈에 담아두고 싶었던 풍경 안으로 들어왔다는 실감이 났다. 바라보는 것과  그 안에 있는 것 중 어느 것이 나은가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가깝게 다가가면 떠나온 곳을 그리워하니 먼 곳만 바라보게 되는 것 같다.   

   

  재즈 페스티벌이 열렸던 드넓은 잔디밭이 눈앞에 펼쳐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여러 나라 뮤지션들의 라이브 공연을 보고 들으며 열기로 가득했을 장소에 아무도 없었다. 단 한 사람도. 쨍한 햇빛 아래 펼쳐지는 고요가 상상 속의 분위기와 대조적이어서 부질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남도가는 길‘이라는 표지판을 따라 남도로 들어섰다. 빨간 칸나가 늘어선 길을 따라 꽃정원 방향으로 걸었다. 남도는 다양한 꽃들로 축제가 열리는 섬이다. 계절 따라 유채꽃, 꽃 양귀비, 해바라기, 수레국화, 구절초, 핑크뮬리 들이 섬을 장식한다. 진분홍 아프리카 봉선화와 각양 갹색의 백일홍이 한창이었다. 북한강과 어우러진 꽃이 있는 풍경에서는 남도를 정성스럽게 가꾼 손길들이 느껴졌다.     

  

  햇빛 받으며 많이 걸어 힘들 즈음, 이태리 포플러 나무 그늘로 들어섰다. 잎들이 늘어져 있고 바람을 느낄 수 있어서 쉬어가기 좋은 장소였다. 바로 앞에 있는 커다란 미루나무의 잎사귀들이 일제히 흔들리며 내는 소리도 시원하게 여겨졌다. 나무들 가까이에서 그늘과 소리를 느끼며 편안해지니까 마냥 머물고 싶었다. 도시에서는 에어컨과 선풍기에 의지하면서도 더위와 씨름해야하는데 자연에 해법이 있는 것 같았다.   

  

  가평역까지 1키로 정도를 걸어갔다. 버스 배차 간격이 길어 기다리기보다 걷는 게 나을 듯 싶었다. 자라섬의 여름은 마음속에 또 하나의 이미지로 남아서 시간이 지나면 들쳐보고 싶은 일기장의 한 페이지가 될 것 같다. 예전 일기를 부담 없이 꺼내어 보듯 경춘선 전철을 또 타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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