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숲을 품은 나지막한 화개산 산자락을 등지고 고택이 터를 잡았다. 툇마루에 앉아 우물과 평상이 있는 너른 마당을 바라본다. 새벽 여명에 배롱나무 진분홍 꽃이 환해진다. 솟을 대문을 나서니 개실마을의 골목길이 구불구불 펼쳐진다. 멀리 보이는 오뚝한 산의 능선에 말갛게 햇살이 퍼진다. 길 양옆으로 흙돌담 위에 기와를 얹은 키 낮은 담장들이 이어진다. 담장 안 옥수수가 키를 높인다. 하얀 박꽃은 덩굴손을 뻗으며 담장 밖으로 기어 나온다. 줄기 한편에 매달린 자잘한 조롱박들이 앙증맞다.
담장에 의지해 꽃들이 피어있다. 능소화는 벽에 몸을 맡기고 주황색 꽃송이들을 늘어뜨렸다. 담장 밑동에는 붉은빛과 노란 색의 분꽃들이 도담도담하다. 모퉁이 한편에 자리 잡은 분홍빛 무궁화는 생기 있게 빛난다. 개실마을이라는 이름이 실감났다. 꽃이 피는 아름다운 골이라 하여 開化室이라 했다가 개애실이 되었고 개실이라 불리게 되었다. 개실마을은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후손들이 1650년경에 피신해 살며 형성됐다. 일선 김씨들의 집성촌으로 350여 년간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점필재 종택, 강학건물인 도연재, 공덕비인 일선김씨 세거비, 재실인 추우제 등의 유적지를 보면 마을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개실마을은 여느 농촌마을처럼 최근에 변화속도가 급격하게 컸다. 많은 전통이 사라졌지만 농촌 체험을 통해 옛 풍속을 경험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떡메치기, 친환경농법, 짚풀 만들기, 엿 만들기 체험으로 옛 생활 방식을 조금 엿볼 수 있다. 논에는 우렁이들이 느릿느릿 움직이고 개구리가 팔짝거린다. 친환경농법을 고수한 덕일 것이다. 전 날에는 개실각 체험장에서 엿 만들기 체험을 했다. 단체로 온 사람들은 둘씩 마주 앉았다. 꼬들 밥에 엿기름가루를 넣어 밥솥에서 삭힌 조청을 달여 만든 강엿이 쟁반 위 쌀가루위에 둥글게 놓여졌다. 둘이 마주보고 앉아서 강엿을 뭉쳐 길게 모양을 잡아주고 당기고 접어주며 늘리기를 반복했다. 엿을 길쭉하게 만들어 굳히고 나무막대로 엿치기를 해서 잘게 부러뜨렸다. 엿은 부드럽고 크게 달지 않아 먹기 편했다. 긴장을 완화시켜주는 영양식이다. 오랫동안 전통 엿을 만들어왔을 할머니들이 시범을 보여주고 도와주었다. 활기찼을 마을은 노인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바뀌었다. 체험장 안에 걸린 10여 년 전 사진에는 할아버지들도 꽤 있었다. 지금은 할머니들이 많다. 체험을 진행하는 위원장님은 예순이 가까운데 마을에서 어린 편이라고 했다. 개실마을의 할머니들은 변화에 적응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시는 분들도 있다. 한옥들도 조금씩 개량되었다. 마을길의 전봇대 아래 나무 표지판에는 석정댁, 못골댁, 웅기댁 같은 집 이름들이 적혀있다. 할머니들이 숙박자들을 위해 집을 내어주고 있다.
길 따라 걸으며 집안에 심어진 석류나무나 모과나무를 보면서 기웃거렸다. 담장이 끊기고 대문이 뜯겨져 나간 집 앞에 섰다. 한옥은 옛 전통 모습을 많이 간직한 채였지만 그렇게 낡지는 않은 상태였다. 마당은 누가 심었는지 온통 콩밭이었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아서 땅을 활용한 것 같았다. 다른 집과 분위기가 달랐다. 온기가 없었다. 마당 한편에는 억세고 거친 풀들이 가득했다. 한그루 감나무도 쓸쓸해 보였다. 그 집의 주인은 누구였을지. 그 자손은 어느 도시에서 살고 있을지.
혼자 사는 할머니가 대문 열린 마당에서 고추를 말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고양이가 안으로 뛰어들었다가 할머니에게 혼나서 골목으로 내빼다가 빠꼼히 쳐다봤다. 사람의 손길이 간 집은 느낌이 다르다. 따뜻하다. 골목 입구에 들어선 어떤 집은 아침 햇빛을 가득 받아 황톳빛으로 빛났다. 대문은 반질반질하고 문 옆에 표지석도 둥글둥글 잘 다듬어져 있다. 앞 담은 연녹색 이파리들과 자잘한 붉은 꽃들로 덮여있다. 살짝 열린 문 안으로 잘 가꾸어진 잔디와 댓돌들, 화분들이 보였다. 감나무 잎들은 윤기 있게 빛나고 넝쿨을 올린 넓은 포도잎 사이에서는 알알이 포도송이들이 맺혀있다. 낮은 담 너머로도 마당 풍경이 보였다. 앞마당의 물통에는 물이 그득했고 빨래 틀에는 수건들이 걸렸다. 가마솥과 연통 주변에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나무상이 자리 잡았다. 자전거와 고무호스, 지붕 빗물 홈에서 내려오는 빗물받이 통은 생동감있다. 뒷마당에는 난로와 장작이 그득 쌓였다. 추울 때를 준비하는 손길도 엿볼 수 있다. 그 집은 온통 사람의 온기로 가득했다.
넓은 길을 따라 걷다가 또 다른 골목으로 접어든다.
“아이는 없나?”
담장너머로 주인 할머니의 말소리가 넘어온다. 여자 여행객 두 명에게 주인 할머니가 묻는 이야기다. 혼자 사는 할머니는 말벗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돌아보니 대화를 나누던 여행객들은 산책을 나갔고 할머니는 보행보조기를 밀고 나왔다. 하얀 머리에 많이 굽은 등이 아흔은 넘어 보인다.
“방금 차 올라갔지?”
할머니는 길 위로 올라간 차를 보고 밖으로 나온 듯했다. 아들이 온 것 같다며 발길을 옮기는 할머니. ‘딸이라면 집 쪽으로 왔을텐데’라며 딸은 포항에 산다고 덧붙였다. 할머니가 가는 곳으로 따라가니 축사가 보였다. 몇 마리씩 모여 서있는 커다란 소들의 눈망울이 순둥순둥하다. 할머니는 축사 앞에 서있는 검은 승용차가 아들 차인지 확인하려고 어려운 걸음걸음을 힘겹게 움직였다. 자녀들을 살뜰하게 챙겼을 할머니의 풍성했던 젊은 날이 상상되었다.
아침 산책을 하고 개실각 체험장에서 식사를 한 후 체험자 일행들은 점필재 종택을 볼 기회를 가졌다. 마당을 들어서니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의 맞배지붕 형태의 사랑채가 드러났다. 현판에는 임금님이 호를 내렸다는 文忠世家(문충세가)라고 글자가 적혀있다. 남자가 기거하는 사랑채 너머 뒤편으로는 안주인이 생활하는 안채가 들어앉았다. 대나무 숲을 병풍 삼고 정성들인 화분이 잘 가꾸어진 마당을 품은 안채는 푸근했다. 점필재 종택은 4대 봉제사를 지내며 일 년에 14번의 제사가 있다고 한다. 집주인은 10여 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전통적인 오일장을 지냈다. 앞으로 개실마을의 전통이 유지 될수 있을지.
평소에 농촌마을에서 살아보고 싶은 바램도 있었다. 체험기회가 있어 호기심을 갖고 참여했다. 하룻밤 고택에서 묵어보니 정취도 있지만 밤에 환기를 위해 방문을 열고 자야될지 망설여지기도 했다. 벌레나 보안이 우려가 됐다. 도시생활은 문을 꼭 닫아걸고 방충망을 꼼꼼히 챙기면서도 틈틈이 자연의 넉넉함을 그리워한다.
고령의 개실마을에는 70여 가구 80여명이 산다. 산 높고 물 맑은 고령(高靈)은 나이가 많다는 고령(高齡)이 아니다. ‘젊은 고령, 힘있는 고령’이라는 문구가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지금 사는 마을 주민들이 더 나이가 들고 그 자녀들이 돌아와 이곳을 지키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개실마을의 명맥은 잇기가 어려울 것이다. 농촌 체험자들이 찾아와 관심을 보이게 되고 정착을 할 수도 있지만 그 수가 많지 않다면 안타깝게 폐가가 늘어난다. 도시생활을 하는 젊은이들이 마을로 찾아와 나이 들어가며 그 전통을 이어가길 바래본다. 개실마을이 존속될 수 있는 아이디어가 강구되어야 한다. 사람의 온기 가득한 개실마을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