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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자의 겨울 한라산 입덕기

영실에서 윗세오름까지

by 별나라


여러 사정상 아침 10시에 제주 공항에서 한라산 영실로 출발했다.

물론 사정이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새벽에 한라산 등반을 위해 출발하는 건 나에게 힘든 일이다.

한라산 등반을 위해 생애 처음으로 마련한 발목까지 오는 등산화와 오천원에 빌린 아이젠, 정상에서 먹을 컵라면과 뜨거운 물, 감말랭이와 기타 행동식을 준비했다.

이것 저것 알아보고 직구한 등산화는 길들이지 않아도 발에 짝짝 붙는다고 해야 할까. 너무 편했다. 잘샀다 정말.

제주 공항에서 한라산 영실 탐방로 입구까지는 50분 정도 걸린다.

제주에 오는 동생을 마중하기 위해 다시 공항에 오후 5시까지는 와야하니 윗세오름을 지나 남벽분기점까지 다녀올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 계산이 매우 수학적이지만 얼마나 멍청한 계산이었는지 깨닫게 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라산 영실 코스는 성판악이나 관음사 코스와는 달리 예약이 필요치 않다.

그러나 짧지만 강렬하게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는 멋진 코스다. 차가 없다면 영실에서 어리목쪽으로 내려올 수도 있다.



겨울 한라산은 언제부터 이렇게 인기가 있었을까


네비에 영실탐방로 입구를 찍고 한라산에 올라오는데 이미 갓길에 주차되어 있다. 목적지까지는 5.5키로가 남아 있었다.

설마....여기까지 주차를 한걸까. 혹시 그렇다하더라도 일찌감치 산을 올라간 사람들이 이미 내려왔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져보았다.

그래서 우연히 저 위에 주차 빈자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늘 그렇듯 행운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단 한자리도 나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매표소 주차장이 보이지 않는데도 주차장에 자리가 없다는 메가폰 소리가 한라산 전체에 울려퍼졌다.

회차를 하여 아까 보았던 저~~아래 자리로 내려가서 주차를 했다.

싸가지고 온 커피를 마시며 잠시 생각을 했다. 오늘 과연 올라갈 수 있을까. 이대로 포기하고 다음에 다시 올까.시간은 벌써 11시 10분을 향해간다.

논리적으로 다음에 다시 오는게 맞지만...그래도 이미 왔으니 일단 올라가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아스팔트로 이어진 오르막길은 그래도 눈이 쌓여 있지 않아서 힘들지만 빠르게 올라갔다.

그런데 웬걸, 주차장 매표소에 다가오니 또 메가폰 방송이 나왔다.

영실 탐방로 입구까지 여기 매표소 주차장에서 50분이 걸리는데 지금 11시 30분이니 지금 올라오시는 분들은 오늘 한라산을 입산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그러니 얼른 포기하고 돌아가라는거겠지. 다시 갈등이었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일단 가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될줄 알면서도 시도하는건 정말 무모하다. 그러나 이런 시도에는 혹시나...어쩌면...이라는 일말의 가능성이 숨어 있다.

오르막 아스팔트길을 날듯이 올라와서 기진맥진인데 이번에는 아이젠을 장착하고 스키장 슬로프 같은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

정말 열심히, 땀이 쭉 나도록 올랐는데...어느 순간 아 이건 안되는일이구나... 더이상은 힘들다....에휴

포기하고 아예 사진 찍으며 산책하는 느낌으로 걷고 있는데 아래서 부터 위까지 장비를 전문적으로 갖추신 분이 쌩~~하고 내 옆을 지나가셨다.

저분을 따라가면 왠지 시간안에 도착할 수 있을듯했다.

역시! 내 예상은 맞았다. 11시 59분에 영실 탐방로 입구에 도착했다. 마치 금메달을 딴 느낌이다.ㅎㅎ

대신 화장실은 갈 수 없었다. 화장실은 다녀오면 아마 들어 갈 수 없었을 듯....


매표소 주차장에서 영실 탐방로 입구로 가는길..온통 눈세상. 여기만 걸어도 이미 너무 좋다!


사실 일단 입장만 하면 좀 쉬다가 올라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밀려오는 사람들과 내려오는 사람들이 뒤엉켜 정말 좁고 가파른 길에 쉴 곳은 없었다.

이래저래 무조건 위로 위로 올라간다. 아이젠이 없었더라면 단 한발자국도 옮기지 못할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다.

날씨가 따뜻해 나뭇가지 위의 눈은 모두 녹았지만 땅위의 눈은 정말 두껍게 덮여 있다.

이렇게 두툼한 눈을 본 것이 얼마만인가. 정말이지 신이 났다.

시간이 12시가 넘어서인지 내려오는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정말이지 힘들어보였다. 미끄려지고 넘어지고.

모두 올라가는 것이 차라리 쉽다는 말을 하며...

숨이 넘어가고 모자가 땀범벅이 될 무렵 병풍바위가 나타났다. 와우~~!

분명 처음 본 것은 아닌데....이게 이렇게 멋졌었나싶다.

슬쩍 눈옷을 입은 영실기암들의 모습에 사람들의 탄성이 이어졌다.

그리고 카메라들이 열일하는 시간들.

겨울 제주에 와 사람들이 적어 좋구나 싶었는데 다들 여기 한라산에 있었나보다.

정말 사람이 많았다.


영실기암
병풍바위


한라산에서 백록담 다음으로 신령스럽게 생각하는 곳이 바로 영실이라고 한다. 영실은 백록담의 남서쪽 산허리에 위치한 골짜기로 약 1600미터에 펼쳐져 있다. 둘레가 2킬로미터, 계곡깊이가 약 350미터라고 소개가 된다. 그리고 5000여개에 달하는 기암으로 둘러싸인 골짜기로 한라산을 대표하는 절경중의 절경이라고 한다.

정말 말그대로 수많은 기암으로 깊은 계곡이 에워싸 있다.

"그래 이맛에 산에 오는거지~"라는 멘트가 절로 나온다.

병풍바위와 영실 기암들의 위엄은 정말 사진으로는 표현이 안된다. 파란 하늘과 대비되어 자연의 위대함, 그리고 아름다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얼어버린 폭포
저멀리 바다까지 보인다
내려다보니 오름들이 즐비하다

사실 산을 오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요즘은 둘레길이 인기다.

하지만 올라가야만 보이는 것이 있다. 잠시 숨을 고르느라 뒤를 돌아보면 저 아래 오름들이 마치 신하처럼 쭉 늘어서 있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은 참 공평하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올라온 만큼, 그리고 땀 흘린 만큼 아름다움을 내어준다.

내가 한라산을 오른 날은 최고기온이 10도가 넘었고 날씨가 정말 좋았다. 겨울인데도 이렇게 춥지 않게 산을 오를 수 있다니...

비록 땀은 났지만 시원하고 상쾌한 공기가 마스크를 뚫고 들어와 머리 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기온이 높아서인지 설질은 정말 최악이었다. 발 밑의 눈이 마치 슬러쉬처럼 녹아 있어 잠시 방심을 하면 그냥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구상나무 숲

영실 코스를 올라가다 보면 처음에는 평이하지만 어느순간 가파른 계단이 계속된다.

난이도 상 코스를 지나다보면 어느순간 구상나무 숲을 만나게 된다. 아 이제 거의 끝났구나!

1400미터 이상의 고지에서만 산다는 구상나무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나무라고 한다.

한라산과 더불어 지리산, 덕유산 등의 높은 산에서 사라아가는 상록수이다.

구상나무 숲 구간을 지나며 온도 변화를 느꼈다. 이마에 송글 송글 맺혔던 땀이 살살 가시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순간 그가 나타났다. 백록담을 품은 화구벽이 눈앞에 선명하다.

난 이 화구벽을 한라봉이라 부른다. 정말 한라봉 꼭지와 꼭 닮았다!!

제주도를 여행하고 눈 쌓인 이 화구벽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드디어 눈앞에서 영접하게 되었다.

엄청 크구나!!


백록담을 품은 화구벽


내가 올라간 날 한라산 영실의 풍광은 정말 예술이었다.

딱 세가지 색감만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색의 눈밭, 더이상 파랄수 없는 울트라마린 블루빛의 하늘, 그리고 짙은 먹색의 백록담 품은 화구벽인 한라봉.

울긋불긋 꽃들의 향연도 아름답고, 꼬까옷으로 갈아입은 단풍도 멋지겠지만

담백하고 순수하게 딱 필요한 색감만 최고로 뽑아내어 보여주는 단순함의 미학을 가진 겨울 한라산의 풍광은 정말 압권이었다.

복잡한 머리속이 시원하게 한방에 정리되는 느낌이다.

사실 내평생 몇번 오른 한라산은 한여름이라 항상 너무 더웠다. 멋진 풍광도 더위 앞에서는 감흥이 덜하다.

그런데 추위에 벌벌 떨며 고행길이라 예상했던 겨울 한라산에서 정말 취향저격의 날씨와 기름기 쏙 뺀 담백한 풍경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런 풍광을 두고 쉽게 발걸음을 돌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공항까지 시간 맞춰 가야했기에 싸가지고 온 컵라면도 먹지 못하고 하산을 한다.

영실 탐방로 입구에서 윗세오름까지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고 했는데 중간에 사진도 찍고 해서 1시간 45분 정도 소요되었다.

하지만 하산은 30분만에 주파. 마음이 급했던 것도 있었지만 워낙 눈길이라 쭉쭉 미끄러져 내려와 더 빨랐던거 같았다.



처음에 주차를 했을때는 몰랐는데 정말 정말 저 밑에 주차를 했었나보다.

아무리 내려가도 내려가도 내 차가 보이지 않아 혹시 지나쳐왔나 싶어 다시 올라가기까지 했다.

하지만 내차는 생각보다 훨씬 밑쪽에 있었다. 아 정말 한라산이 핫스팟이 된건 맞는 말인가 보다.

이래서 다들 한라산은 새벽에 가야한다고 했구나.

하지만 난 게으른 자. 다시 간다고 해도 새벽 깜깜한 시간에 길을 나설 자신이 없다. 그것도 겨울에 말이다.

그냥 좀 더 걷더라고 햇빛이 있는 시간에 주변 풍광을 충분히 즐기며 올라가고 싶다.

게으른 자는 역시 몸이 고생한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달았다는...

이날 걸음수는 거의 35000보...산책삼아 올라간다는 마음이었는데 제대로 된 등산이었다.

올해 한라산 진달래와 단풍도 보게되는 행운이 따르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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