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으로 향하는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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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를 시작한 이후, 나는 ‘몸을 단련하는 일’보다 ‘함께 살아가는 일’이 더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가족, 친구, 그리고 나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매일 부딪히고, 다투고, 다시 화해한다.
그 과정 하나하나가 바로 요가였다.
그중에서도 장모님과의 관계는 나에게 끝나지 않는 수련이다.
일주일에 두 번, 장모님은 세이를 돌보러 오신다. 그날은 내가 잠시 숨을 돌리고, 짝꿍과 데이트를 하거나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고마운 날이다.
하지만 그 감사함 뒤에는 작은 파도가 일어난다.
우리 집 주방은 내가 주로 사용하는 공간이라, 나만의 질서와 리듬이 있다.
장모님이 오신 날엔 그 질서가 흔들린다.
그 작은 어긋남을 보고도 내 감각을 다스리는 일, 그것이 나의 프라티야하라(감각의 수렴)이다.
어느 날은 그런 사소한 일들이 쌓여 돌처럼 무거워지기도 한다.
그 돌을 던지듯 짝꿍과 다투고, 그날 밤 그는 잠을 설친다. 새벽에 눈을 뜨면, 나는 혼자 거실에 앉아 회계하듯 명상한다.
그날의 감정, 내 안의 서툰 감각,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다시 다듬는다.
야마는 그런 관계의 수련이다.
몸의 움직임보다 먼저 마음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일.
세상과, 그리고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조화롭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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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속에서 ‘작은 폭력’이 일어난다.
서둘러야 하는 마음, 나보다 느린 이에게 쏟는 짜증,
내 몸을 억지로 밀어붙이는 욕심.
아침 출근길,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걷다가도
보행 중 흡연자의 연기가 내 호흡에 스며들면 순간 짜증이 치민다.
나는 숨을 멈추고, 걸음을 빠르게 옮긴다.
그 짧은 순간, 요가가 내게 남긴 가장 큰 선물— 호흡의 통제력—을 느낀다.
예전 같으면 화를 냈을 일도, 이제는 긴 숨 한 번으로 부드럽게 흘려보낼 수 있다.
아힘사는 단지 폭력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긴장을 풀어내는 부드러움의 선택이다.
호흡을 길게 내쉴 때, 몸의 굳은 근육이 풀리듯 마음의 경계도 함께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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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를 하면서 배운 또 하나의 깨달음은 ‘정직한 자세’의 중요성이다.
거울 속 내 몸이 완벽하지 않아도, 균형이 흔들려도 괜찮다.
아사나 수련을 하다 보면, 자세가 외부로 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에너지를 안쪽으로 흐르게 하는 연습을 한다.
숨기지 않아도 되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것은 과정이고, 현존의 연습이다.
사티야는 그런 용기다.
“지금의 나는 괜찮다.”
이 단순한 한 문장이 수련의 중심을 단단히 세운다.
진실은 정확한 형태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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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를 오래 하다 보면 ‘더 유연해야 한다’,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는 욕망이 스며든다.
그러나 아스테야는 이렇게 말한다.
“이미 네 안에는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
행복의 크기는 소유의 양이 아니라 감각의 깊이에 달려 있다.
작은 일상에도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풍요다.
절제된 소유는 포기가 아니라 감사의 태도다.
숨 한 번, 물 한 모금, 햇살 한 줄기에도 ‘충분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요가이고, 삶의 균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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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늘 분주하다.
알림음, 마감, 생각의 소용돌이 속에서 에너지는 쉽게 흩어진다.
요가는 그런 나를 안으로 초대한다.
하루 중 단 10분이라도 호흡과 함께 머물 때, 흩어졌던 에너지가 한 곳으로 모인다.
그 순간, 마음은 고요를, 몸은 중심을 찾는다.
브라흐마차리야는 절제가 아니라, 내 에너지를 중심을 향해 쓰는 지혜다.
집중이란 억누름이 아니라 선택이다.
나는 이제, 내 에너지를 흩뿌리지 않고, 하루의 중심로 모으는 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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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잡으려 애쓰는 동안 손 안의 온기를 잃는다.
비워야 채워지고, 놓아야 다가올 수 있다.
때때로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큰 것을 얻으려 애쓰곤 한다.
몸이, 마음이, 능력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 무리하게 채우려는 욕망은 결국 깨지고 무너진다.
요가는 말한다
결과를 움켜쥐려는 마음을 내려놓을 때 몸은 부드러워지고, 마음은 자유로워진다고.
아파리그라하는 단순한 비소유가 아니라, 흐름과 함께 사는 법이다.
그 순간, 삶은 훨씬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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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는 결국 함께 살아가는 연습이다.
아힘사로 부드럽게,
사티야로 진실하게,
아스테야로 감사하며,
브라흐마차리야로 집중하고,
아파리그라하로 놓아주는 법을 배운다.
“나의 평온이 곧 타인에게 전해진다”는 믿음으로.
오늘도 나는 호흡한다.
그 숨은 나에게 머물지 않고,
누군가의 하루로, 누군가의 평화로
작게, 그러나 확실하게 번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