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십수 년 전, 당시 가깝게 지내던 형님이 계셨는데 그 형님의 생신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을 때, 마침 크리스마스 즈음이기도 하고 연말이기도 해서 뭔가 조금 특별한 선물이 없을까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문득, 하나뿐인 아들을 끔찍이도 사랑하셨던 '아들 바보' 형님을 위해, 아이의 사진을 모아서 포토달력을 만들어 드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인터넷으로 자기가 고른 사진을 직접 넣어 만들 수 있는 달력을 만들 수 있는 사이트들이 막 생기던 시기였다.
계획은 그럴듯했지만 처음부터 문제에 부딪쳤다. 나의 아이도 아닌데 사진들을 어떻게 구한다? 고심 끝에 찾아낸 방법. 당시 유행하던 싸이월드 사진첩을 일일이 뒤지기로 했다. 그렇게 사진을 모은 뒤 직접 포토달력을 편집해 선물로 드렸더니 뜻밖의 반응. 예상보다 훨씬 더 감동해하시는 게 아닌가. 돈이 그렇게 많이 들지도 않은 선물이었다. 선물은 역시 정성이 중요하다더니 그렇게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니 스스로도 '아 참 좋은 선물을 드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이 참 기특했다. 어떻게 그렇게 신통방통한 생각을 했는지.
내 아이가 주인공인 포토달력 만들기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나의 아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역시 연말이 되었다. 그러자 그때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래! 이번에야말로 우리 아이를 주인공으로 멋들어진 포토달력을 만들어보는 거다!!’
우선 사진을 고르는 게 첫 번째 작업이었다. 사진이야 딸아이가 태어나자마자부터 세상 어느 파파라치 부럽지 않게 일거수일투족을 담은 터라 절대 부족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촬영한 사진이 너무 많아 고르기가 힘들 정도였다. 편집이란 게 결국은 내가 원하는 그림을 고르는 작업인데 PD라는 직업 덕분에 마르고 닳도록 편집이란 걸 했지만 이렇게 내가 원하는 그림을 골라내기가 힘든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였다. 거의 하룻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해서 사진을 추려냈다.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는 단순히 사진을 선택하는 것뿐 아니라 한 장 한 장 사진에 얽힌 추억들을 회상하는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리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편집 디자인 작업. 내가 원하는 배경 디자인을 고르고 월별로 사진을 배치하는 작업이다. 어떤 디자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월별로 적게는 한두 장에서 많게는 대여섯 장의 사진이 필요하다. 말만 들어도 복잡하다고? 걱정 마시라. 어지간한 포토달력 제작 사이트에 들어가면 초보자도 쉽게 해낼 수 있을 만큼 프로그램이 잘 갖춰져 있다. 그런데 어쩐지 심혈을 기울여 고른 사진을 대충 맥락도 없이 끼워 넣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생각해낸 게 사진을 촬영한 시기와 달력의 시기를 맞추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1월에 사진을 찍었으면 1월 달 칸에 사진을 집어넣고 2월에 찍었으면 2월에 집어넣고.. 이런 식이 었다. 그렇게 정리하니 어쩐지 계절감에 맞는 달력이 되는 것 같아 괜히 혼자 뿌듯해졌다. 기억하건대 그렇게 달력을 만들던 첫해에는 사진 고르는데 하루, 월별로 사진 배열하는데 하루가 걸린 것 같다. 피곤했지만 그깟 피곤 따위가 뭐가 중요하랴. 아빠가 되고 나서 언제는 안 피곤했던가. 이렇게 행복한 피곤이라면 얼마든지!
모든 작업을 마치고 최종 인쇄 주문을 했다. 며칠이 지났을까? 드디어 도착한 세상 하나뿐인 내 딸아이의 달력!! 모니터 화면으로만 보다가 실물 달력으로 접하니 감회가 더욱 남달랐다. 이 좋은걸 우리 가족만 볼 수 없어 넉넉하게 만들어 양가 할아버지 할머니께 선물로 드렸더니 함박웃음을 지으며 좋아하시는 건 물론이요 그때부터 1년 내내 할아버지 할머니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손녀딸의 예쁜 얼굴이 가득한 달력이 놓여 있게 되었다.
그 후로 매해 연말이 되면 난 성스러운 마음으로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는다. ‘그래 올봄에는 아이 태어나고 처음으로 괌에 해외여행을 갔었지’, ‘맞아 여름에 참 더웠는데 양양 바닷가에 가서 재밌게 놀았어’, ‘추석이라 한복을 처음 사 입혔는데 어쩌면 이리도 귀여울까’ 등등.. 사진을 고르다 보면 행복했던 시간들이 그야말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어쩌면 달력이라는 결과물보다 달력을 만들기 위해 1년을 돌아보며 사진을 고르는 시간이 더욱 뜻깊고 행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 가족을 위한 나만의 행복한 루틴
내가 아는 어느 가족은 벚꽃이 필 때면 매년 같은 장소에 가서 벚꽃나무를 배경으로 아이들 사진을 찍어준다고 한다. 또 어느 가족은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사진관에 가서 멋지게 옷을 차려입고 가족사진을 찍는다고 한다. 이렇게 가족들마다 한해 한해 시간이 지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나름의 방식이 있는 것 같다. 이런 걸 루틴이라고 하던가? 우리 가족에겐 아이의 1년 생활을 포토 달력으로 남기는 게 그런 루틴이 되었다.
달력이 쌓여 갈수록 아이는 커가고 우리 가족의 추억도 쌓여만 간다. 앞서 말한 형님의 아들은 벌써 입대를 해 군인 아저씨가 되었다. 우리 딸도 얼마 후면 눈 깜짝할 새에 어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 이런 달력을 만들 수 있을까?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결국은 내가 만들고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아 나 혼자 보게 될지라도 매해 연말 나만의 경건한 의식처럼 딸아이를 주인공으로 한 달력 만들기가 오래오래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아빠 여러분! 이제부터라도 사진 열심히 찍으시고 그 사진으로 꼭 연말에 달력을 만들어보세요. 1만~2만 원 정도만 있으면 후회하지 않을 만큼 멋진 우리 가족의 기념품이 남게 될 겁니다. 믿으세요. 자타공인 10년 딸바보가 보증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