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랑 씻을래

이렇게 10년 키웠어요 열두 번째 이야기

by 박뚠뚠

아이를 키워 본 부모들이라면 공감하겠지만 신생아 시절 아이를 목욕시킨다는 건 엄청난 공력이 들어가는 대공사이다. 만일 첫째 아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왜냐고? 난생처음 해보는 부모 짓인 데다가 목욕 따윈 시켜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난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한동안은 아이를 안고 있는 것도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너무 작고 여려서 조금만 힘이라도 주고 안으면 마치 부서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런 아이를 씻긴다는 건 절대 녹록지 않은 일일 것이다.


우리 집의 경우에도 목욕이라도 한번 할라치면 아내와 내가 둘 다 달라붙어 땀을 뻘뻘 흘려가며 온 사방을 물바다로 만들어가며 씻겼던 기억이 있다. 한 번은 아내가 잡고 있던 아이가 손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꼬르륵 물을 먹은 적도 있고.. 암튼 목욕은 매일매일 치러야 하는 전쟁과도 같은 행사였다. 그때는 생각했다. 아이가 초등학교쯤 들어가면 혼자서 목욕을 할 수 있으려나?


그로부터 약 10년의 세월이 지났다. 매일 저녁 딸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나 아빠랑 씻어도 돼?


10여 년 동안 딸아이를 목욕시켜 오면서 나는 딱히 이상하다거나 하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지만 어느 날 문득 한발 떨어져서 생각해보니 계속 여자인 딸을 남자인 아빠가 씻겨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딱히 2차 성징과 같은 신체적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10살 정도면 그래도 꽤 큰 여자아이인데 아빠가 목욕을 도와준다는 게 맞는 것인가 싶었던 것이다.


아내에게 물어보니 주변 친구들은 - 남자아이들은 물론이고- 혼자 목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아빠랑 씻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고 했다. 그럼 아이가 좋다고 하더라도 당장 그만둬야 하는 것인가 고민했더니 아내의 말로는 아이 본인이 아빠랑 목욕하는 것을 특별하게 싫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여긴다면 억지로 그만둘 필요는 없다고 어디선가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 딸아이는 도대체 왜 아빠랑 목욕하는 걸 좋아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언제부턴가 목욕하기 싫어하는 딸아이를 위해서 씻겨주는 동안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짧은 전래동화 같은 것을 들려주었는데 아이가 더 재밌는 얘기는 없냐고 채근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딸아이를 주인공으로 해서 나름의 창작동화(?)를 만들어서 들려주었다. 주인공은 딸아이이고 집에 있는 인형들을 조연으로 삼아 이야기를 만든 것이다.. 고백건대 당연히 100% 창작으로 이야기를 만든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아는 이야기들을 급조해 만든 어설픈 스토리였다. '금도끼 은도끼'로 시작해서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끝나거나 뭐 그런 식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반응이 너무 좋은 것이 아닌가? 그날 이후 아이는 매번 목욕하면서 듣는 자신이 주인공인 이야기들을 정말 좋아했다. 오죽하면 매일 저녁쯤 되면 아빠와 목욕하는 걸 기다리며 오늘의 이야기 소재를 정해줄 정도였다. “오늘은 동물원에서 있었던 이야기였으면 좋겠어”, “오늘은 누가누가 부자가 되나 대결하는 내용이었으면 좋겠어” 등등...

목욕 5분 전 이러한 지령이 떨어지면 온 정신을 초집중해서 이야기를 짜기 시작한다. 목욕 시간 그리고 머리 말리는 시간 다 합쳐봐야 10분 남짓. 그 안에 기승전결 그리고 반전, 욕심내자면 교훈까지 들어가 있는 이야기를 짜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간중간 딸아이의 수준에 맞는 언어유희 개그가 양념처럼 들어가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어제 딸아이가 이야기 소재가 잘 생각이 안 나는지 아무 얘기나 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이런 얘기를 만들어서 해줬다.

아빠가 딸한테 마트에 가서 장을 봐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어.

어묵탕을 끓여야 하니까 어묵하고 간장 하고 무를 사 오라고 했어.

그런데 딸이 어묵하고 간장은 사 왔는데 무를 깜빡하고 안 사 왔지 뭐야.

아빠가 “무는 왜 안 사 왔어?” 하고 물었더니 딸이 뭐라고 했게?

“아~ 무!!”

. . .

네가 아무 얘기나 해달라고 해서 아~무!! 얘기해줬어.

유치해서 못 들어주겠다고? 이 이야기를 듣고 당사자인 딸아이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러니 우리 아빠들 이야기 창작에 별 부담 느끼지 않아도 된다. 그 옛날 참새시리즈서부터 최불암 시리즈, 덩달이 시리즈 등등 아무것이나 베껴와도 좋다. 자신감을 갖고 그야말로 아무 얘기나 지어내면 되는 것이다. 아빠들이 무슨 안데르센이나 그림형제도 아니고 어찌 퀄리티 높은 이야기를 매일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인가. 이야기 자체도 중요하겠지만 그저 목욕이란 친밀한 행위 속에서 아빠와 딸의 달달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소소한 추억을 만든다.. 정도로 생각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제까지의 모든 딸아이와의 놀이가 그랬던 것처럼 이야기를 만들고 들려주는 시간이 무척 행복하기만 하다. 물론 아주 조금 창작의 고통이 있긴 하지만 언제까지 딸아이와 목욕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퇴근해서 내 몸도 씻기 귀찮아 그냥 뻗어버리고 싶은 날도 많지만 사랑하는 딸과 이렇게 목욕을 하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겠지 생각하면서 오늘도 기꺼운 마음으로 목욕에 그리고 이야기 만들기에 임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중요한 사실.

하루는 딸아이에게 아빠랑 목욕하는 게 왜 좋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조금은 허망한, 딸아이의 솔직한 속마음을 들을 수 있었다.

아빠는 대충 씻겨 줘서 금방 끝나잖아!


(네 이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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