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이렇게 10년 키웠어요 열여섯 번째 이야기

by 박뚠뚠

당연한 얘기겠지만 20년 넘게 PD 생활을 하다 보니 TV 프로그램 촬영이나 출연에 대해서 신기함이나 설렘을 느끼는 경우는 흔치 않다. 방송국 가는 게 신기할 일은 더더욱 있을 수 없을 테고. 매일 출근하던 자기 회사에 가면서 '아~ 신기하다-' 이럴 사람은 없을 거니까. 그런데 딸아이 덕분에 그런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지금부터 우리 가족에게 오래 기억에 남을 만한 이벤트, 딸아이의 TV 출연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작년 초 딸아이가 다니는 무용학원에 KBS TV 프로그램 제작진으로부터 섭외 요청이 왔다고 했다. 으레 명절이면 흔히 볼 수 있는, 연예인과 가족들이 나와서 노래(동요) 경연을 하는 콘셉트에 설날 특집 프로그램이었는데 무용을 하는 아이들이 중간에 나와 군무로 축하무대를 꾸며야 하는 모양이었다. 학원에서 15명 정도의 아이들을 선발했는데 그중에 하나로 우리 딸아이가 뽑힌 것이다.


무려 KBS에 출연하다

취미반을 거쳐 본격적으로 무용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고 그때까지는 무용 콩쿠르에도 한번 나가보지 않았던 지라 무대 경험은 아예 제로라고 봐야 할 정도였다. 근데 첫 무대가 TV 프로그램이라니! 그것도 공영방송 KBS라니!! 며칠 전부터 자기 혼자 틀리면 어떡하냐고 걱정하는 딸아이 앞에서 아빠가 PD라 잘 아는데 그거 아무것도 아니라며 걱정할 거 하나도 없다고 괜한 허세를 더해 얘기는 해줬지만 정작 내가 긴장되어서 어쩔 줄 모를 지경이었다. 연예인과 스태프들이 잔뜩 있고 카메라가 몇 대씩 돌아가고 있는데 만일.. 우리 딸아이가 실수를 해서 다시 녹화를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아니 한 번이야 그렇다 치지만 계속 NG를 내고 급기야 제작진이 너는 안 되겠다라며 우리 딸만 빠지게 되고.. 아이는 울며불며 뛰어나오고... 괜히 TV 출연한답시고 아이에게 평생 상처로 남을 안 좋은 기억을 심어주는 게 아닌가 하는 별의별 방정맞은 생각들이 들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따박따박 흘러갔고 드디어 녹화 당일인 토요일 아침이 되었다. 유명 연예인이 아닌지라 당연히 녹화장에 분장실 및 대기실이 마련되어 있을 리는 만무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집에서 헤어 및 의상 등 대부분의 준비를 해서 출발하게 되었다. 배경음악이 '캉캉'이었던 만큼 나풀거리는 붉은색 치마가 돋보이는 무대의상에 머리에 커다란 꽃까지 꽂은 화려한 모습이었다. ‘아 참 예쁘다 우리 딸!’ 전날부터 평소 집에서 잘 사용하지도 않아 있지도 않은 헤어스프레이와 머리를 고정할 핀을 산답시고 동네를 헤집고 다닌 보람이 있었다.


오전 11시쯤 여의도에 위치한 KBS 별관에 도착. 주차장에 잠시 대기하다가 다른 친구들까지 다 모여 방송국 안으로 입장. 언제나 녹화날 스튜디오 근처는 수많은 사람들로 분주하긴 마련이지만.. 당연히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어쩐지 그날의 풍경들은 생경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맨날 보던 건데 뭐가 그리 신기하던지. 그 정신없는 와중에 우연하게도 그날 출연자였던 개그맨 형님 중 한 분과 프로그램을 같이 했던 경험이 있던 터라 오랜만에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한편 아이들은 대기실이나 연습실이 주어지지 않아 서럽게도 방송국 로비 한쪽 구석 맨바닥에서 몸을 풀고 연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딱히 점심을 먹을 시간도 주어지지 않아서 매점에서 간단한 주전부리를 사서 틈틈이 먹으며 허기를 채우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는 과연 괜찮은 PD였을까?

오후 3시가 다되어 드디어 녹화 시작. 딱히 방청객이 없던 상황이라 출연자인 아이들이 관객석에 앉아 박수도 치고 환호도 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나도 역시 관객석에 앉아 녹화를 지켜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왜 그렇게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던지. 내가 보기엔 크게 틀리지도 않았던 것 같고 별 차이도 없는데 왜 같은 걸 한 번 더 찍자고 하는 건지. 아니 저기 무대 진행 보는 친구와 부조정실에 있는 PD는 왜 저렇게 커뮤니케이션이 굼뜨기만 한지.. 어라? 스태프들이 기다리는 사람들 생각은 안 하고 설렁설렁 걸어 다니네, 우리 딸 아침 먹고 나서 지금까지 쫄쫄 굶으며 기다려서 배고플 텐데 등등.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던 그때..

문득, 소위 말하는 현타가 왔다. ‘아.. 나도 늘 저랬겠구나 내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수많은 출연자들과 그 주변 사람들도 나처럼 불만이 많았겠구나. 그런데도 별 말없이 촬영에 임해준 거였겠구나.’ 그때부터 반성 모드로 잠자코 보기로 결심. 여러 무대가 지나가고 드디어 우리 딸이 등장할 차례가 되었다.

두근두근...


무대 구성은 개그맨의 코믹 지휘에 맞춰 아이들이 캉캉 춤을 추는 것이었다. 드디어 음악이 시작되고 손짓하나 발짓하나 한 동작 한 동작 표정까지 초집중을 해서 보았다. 그런데 그동안의 걱정이 무색할 만큼 기특하게도 우리 딸을 비롯해서 다들 어쩜 그렇게 한 번도 틀리지 않고 잘 해내던지.

결과는 한방에 대성공!

(물론 지휘 역할을 맡은 개그맨 분의 요청으로 흔히 녹화장에서 얘기하는 '지금 것도 괜찮았는데 한 번만 더 가보면 안 될까요?'가 현실이 되긴 했지만)


후련한 표정으로 내려온 아이에게 물어보니 너무 긴장되었지만 연습했던 대로 그리고 언니들 리드에 맞춰하다 보니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역시 김연아가 그랬듯이 손흥민이 그랬듯이 성공의 비결은 꾸준한 연습뿐이었다. 기특한 것!


하지만 우리 순서가 끝났다고 바로 녹화장을 나와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 그로부터 한참 동안을 모든 순서가 끝날 때까지 관객석에 앉아서 지켜봐야만 했다. 그렇게 모든 녹화가 끝나고 보니 시간은 저녁 7시. 약 8시간을 끼니도 못 챙겨 먹고 녹화를 한 것이었다. 이런 날은 원래 짜장면을 먹어야 되는 법. 근처에 있던 여의도 맛집으로 소문난 중국집에서 식사를 하며 멋진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얼마 후 설날 아침 딸아이가 나온 프로그램이 방송되게 되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보는데, 아.. 무대에선 우리 딸만 보였는데 왜 그렇게 컷을 안 잡아주던지! 우리 딸 얼굴이 그렇게 잠깐 그렇게 조그맣게만 나와야만 했는지.. 안 그러기로 했지만 얼굴도 모를 PD가 괜히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물론 고슴도치 아빠의 철없는 투정에 불과했지만! 아무튼 딸아이 덕분에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을 것 만 같은 즐거운 추억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PD로서의 나의 인생도 돌아보게 되었다.

끝으로 그동안 의도치 않았던 저의 실수나 부주의 때문에 피해를 보셨을 출연자 스태프 그리고 나아가 시청자 분들 정말 죄송합니다. 입장 바꿔 생각을 해보니 이런 것이었더군요. 앞으로 하나하나 세심하게 최선을 다해서 프로그램을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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