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좋았던 때도 있었는데 왜 나쁜 부분만 편집해서 가지고 있냐? 좋았던 때도 많았잖아.” 술에 취해 건네신 말이셨지만 한창 우울의 피크를 타고 있던 저에게는 가슴에 돌을 던진 것만 같은 충격을 준 말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제 슬픔을 공감해주지 못하는, 저를 가장 잘 알고 저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너무도 서러워 울었지만, 시간이 지나 곰곰이 곱씹어보니 그렇습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저는 나쁜 기억 수집가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슬펐던, 아팠던 기억이 그렇습니다. 삼촌에 대한 이야기가, 엄마에 대한 이야기가, 그리고 가난에 대한 이야기가 저의 어린 시절을 관통하는 어떤 해시태그 같은 것이 되어버린 지가 얼마나 되었을까요. 물론 그 사이에 좋았던 기억도 분명 있습니다. 그 틈새에 일상이 있었고, 제가 웃었던 순간도 행복을 느꼈던 순간도 분명 있었습니다. 할머니께서 쪄주시던 쑥 개떡이 좋았고, 지어 주시던 식혜가 좋았습니다. 겨울이 오면 이불속에서 무릎에 저를 앉힌 채 숟가락으로 긁어 입에 떠 넣어 주시던 홍시가 좋았습니다. 입가로 홍시가 흐르면 숟가락으로 싹 쓸어 올려 입에 도로 넣어 주시던 그 손길을 기억합니다. 그 모든 게 사랑이 아니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택시 기사이셨던 아빠의 퇴근을 밤늦은 때까지 기다리다 소주에 늦은 저녁을 드시는 아빠 곁에서 한 입씩 빼앗아 먹던 닭고기 뭇국이, 오빠를 졸졸 쫓아다니다가 넘어져 다치기 일쑤였지만 함께 웃고 말썽 피우던 시간이 좋았습니다.
사랑이 있었습니다. 분명 그곳에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힘들었던 시간 속 의미를 찾고, 그 의미만을 남기고 지나간 일들을 모두 떠나보내려 합니다. 사랑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다 말입니다. 가난으로 고통받았던 시절에도 다름없이 저를 아끼던 소중한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밖에서는 수치스러운 가난이었지만, 집에서는 나누어 먹던 끼니에 감사했습니다. 반지하고, 옥탑이어도 여름철 햇빛을 가려주고, 겨울철 찬 바람을 막아주던 벽이 있고, 천장이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어떤 문제든 최선을 다해 해결방안을 주고자 노력했던 아빠께서 제 삶에 그늘이 되어주셨습니다.
덕분에 저는 바르게 컸고, 가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찌감치 취업을 했습니다. 그들이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게 진정한 초심입니다. 지금은 피해의식으로 얼룩져 제가 잊고 지냈던 초심입니다. 희생이라 부르기에도 우스운 저의 희생은 주변의 같은 선상이라 생각했던 친구들의 앞서감에 초조해지고 절박해져 피해의식으로 전락했습니다. 나는 왜 이런 집에 태어났을까. 한데 그 아래, 제 발 밑에 아빠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20년간 자신의 입을 옷 하나 새것으로 사지 않고, 어린 두 자녀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나이 들어버린 아빠의 청춘이 있었습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때의 아빠는 그렇게 나이가 많지 않았는데, 고작 사십 줄이셨던 아빠께서 올해로 60이 되셨습니다. 그 20년간 자신을 위한 것은 작은 과일 하나도 사지 못하고, 생때같은 두 자식 입에 들어갈 것만 바라보며 친구도, 연인도 없이 그 오랜 시간을 견디셨습니다. 방파제가 되어 저를 다치지 않게 해 주려 애쓰심을 저는 잠시 잊고, 내가 너무 아프다고, 내가 너무 힘들다며 그 앞에서 펑펑 울어 가슴에 못질을 했습니다.
강해져야 한다고, 감정에 무뎌져야 한다고 되뇌던 열일곱의 제가 어쩌면, 스물여덟이 되어버린 저보다 더욱 성숙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보다 더욱 방향을 잘 알았고, 그 방향을 향해 미친 속도로 달리던 그때의 어린 제가 기특하고 고맙습니다. 그 덕분에 지금의 저는 마음껏 방황하고, 방향을 잃고 잠시 헤매도 굴러 떨어지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저는 이제 나아질 것입니다. 지켜야 할 소중한 가족들이 있고, 그들이 다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원 없이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노력이 아빠의 상처받아도 울지 못하던 그 가련한 청춘에 보답할 수 있는 길이기를 바랍니다. 홀로 서 세상의 풍파를 온몸으로 막아내던 그 아픈 시절에 대한 작은 보상이라도 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이제는 사랑만 남기고 나쁜 기억은 보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