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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현 Jan 13. 2022

중동국가의 외국인 노동자

현실이란 어느 날 훅, 다가오는

    아랍에미리트, 현재 제가 일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곳의 아부다비의, 루와이스의, 바라카. 이곳이 제가 일하고 있는 발전소입니다. 이곳에 온 이유는 돈입니다. 영어도 잘하게 되면 좋고, 해외에서 일해보는 경험도 있으면 좋지 싶은 마음이 도합 10% 정도라면 나머지는 다 돈입니다. 아빠께서 밖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다니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좀… 그래 보인다며. 그럼에도 파견을 오기 전에 일하던 근무지에서 선배님들께서 왜 꽃다운 나이에 척박한 곳을 가냐며 하문해 오실 때마다 저는 조용히 손가락을 오므려 동그라미를 만들어 슬쩍 보였습니다. 그리고 눈빛으로 말했습니다. ‘돈이요.’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우습게도 언어와 뜻깊은 경험~ 같은 이야기를 하면 “가면 얼~마나 힘든 줄이나 아냐. 건강 다 무너진다. 젊은 시절 아깝게 흘려보내지 마라.” 하며 뜯어말리는데 제 동그라미를 본 사람들은 모두 그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제 선택을 존중한다는 뜻이었겠지요. 아무래도 이곳이 국내보다 (고생하는 만큼) 연봉이 좋은 것은 사실이니 말입니다.


    저는 소녀가장입니다. 스물일곱 나이가 소녀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만큼은 소녀이니 소녀가장입니다. 그러니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저는 반지하 집이 너무나 지긋지긋하게 싫었고, 그곳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반지하, 지하, 반지하, 그리고 옥탑방… 같은 동네에서 몇 번의 이사를 거쳤습니다만 다 하나같이 ‘가난’을 실사화 한 것 같은 그런 집들이였습니다. 제가 취업을 하고 대출을 받아 이제야 1층에 살게 되었을 때 아빠는 감격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소현이 덕분에 호강한다고. 그 낡은 집에 전세로 들어가면서도 행복해하셨습니다. 한데 이제 다시 반지하로 간다고 합니다. 전세 집주인님께서 가족이 들어와 살 것이니 집을 비워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지금 전세 대란. 전세가 없습니다. 있어도 비쌉니다. 따라서 지금 살고 있는 집보다 수 평은 작은, 반지하 집이면서도 전세 가격은 1.5배가 넘는 그곳으로 가야 한다. 는 말을 미안해하시는 아빠. 마음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허탈함이 느껴졌습니다. 2년 간 열심히 벌었다고 생각했는데, 무언가 변화를 바라기엔 아직도 역부족이라는 사실이 말입니다.


    내일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 대출 한도를 알아봐야 합니다. 아마 대출이 잘 나오기는 할 테니 그건 다행입니다.(그리고 사후의 이야기지만 대출 거절을 당했습니다.) 오늘 저녁에도 부동산에 전화를 걸어보고 어제 봤던 매물을 물어보니 벌써 나갔다고 합니다. 제 눈에 좋은 건 남의 눈에도 좋은 법입니다. 유사 매물을 찾아봐 주시겠다며 연락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뒤에도 부동산 어플을 두어 개 더 깔아서 몇 가지 괜찮은 매물을 알아봤습니다. 모두 지난 전세보다 2배 내지 2.5배, 크게는 3배 비싼 값입니다. 그래도 다시 반지하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은 오빠나 저나 그 지긋지긋함이 마찬가지라 서로 간 정보를 공유하며 전투적으로 찾아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너무 어린 시절부터, 삶의 대부분을 반지하나 옥탑에서 지내다 보니 진절머리가 난 것만큼은 똑같은 겁니다. 그래도 이렇게 대출, 전세, 계약을 살피니 저에게 이런 것을 결정할 권한이 생겼구나, 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어린 시절 아빠 혼자 모든 것을 고민하고 결정했을 그 과정이 마음 시립니다. 이제는 어렵게 키운 두 자녀가 성인이 되었으니 덕을 좀 보셔야 합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습니다. 정말 많이, 가난이 더 이상 뒤를 쫓지 못하도록. 가난이라는 것이 제 선에서 끊어지고 나중에는 그 흔적마저 희미해지기를 바랍니다. 그 슬픔을 너무도 뼈저리게 알기에 가난으로 겪은 수치를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으며, 저 스스로도 그 굴레에서 이제는 벗어나고 싶습니다.


    예전에 기초생활수급자이던 시절, 행복도시락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집으로 배달해주는 무상급식이었습니다. 가족들끼리 나누어 먹던 그 도시락을, 제 또래의 중학생쯤 되는 아이가 들고 우리 집 문 앞에 서있었을 때의 그 충격, 그 문 하나를 사이에 둔 괴리가 십여 년이 넘도록 잊히지 않습니다. 그 아이는 봉사 중이었고, 저는, 그래. 살아남는 중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누구에게도 증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린이는 어려야 하고, 철이 없어야 하고, 돈 걱정은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지 못했던 경험은 저로 족합니다.


    이 글을 성공한 뒤에 쓰면 좋겠지만, 언젠가 성공할 터이니 미리 써 놓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대출 한도를 알아봐야 하니 글은 이만 쓰겠습니다. 눈 뜨자마자 온라인 뱅킹으로 대출한도를 살피고, 오전에는 몰래 회의실에 가서 부동산 세 군데 전화를 돌려봐야 합니다. 국제전화번호라 보이스 피싱 의심을 받아 다섯 번씩은 걸어야 겨우 받아주거나 혹은 차단입니다. 어른 소현 힘 내. 성공하자. 사는 동안 많이 버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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