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이야기 하지 않는 사람들
드러내면 표적만 될 뿐
지금 나는, 영하 70도의 러시아 오미야콘을 여행하는 관광객 같다. 오른손을 왼쪽 겨드랑이에 끼고 살짝 등을 구부린 채로 23000원하는 김치볶음밥을 쳐다보고 있다. 내 옆에는 매끈하고 단단한 피부와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여성분들이 둘러앉아있다. 촤르르 떨어지는 듯한 캐시미어와 스트레치 패브릭으로 만들어진 옷은 반짝이는 구슬을 더 빛나게 만들어주는 고급원단 같다.
‘이 느낌’이 아직 생소한 나는 눈앞에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피하듯 게슴츠레 눈을 뜨고 있다. 이제 몇 번 엄마들 모임에 나와 봐서 그들 사이에 튀는 복장은 아니지만 누가 내 셔츠를 만지며 ‘어머 이건 면100%네요’라고 할까봐 한껏 몸을 움츠리고 있다. 그런데 꽁꽁 언 몸을 녹여주는 따뜻한 대사가 들려온다.
“이번에 전세연장 하는데, 집주인이 2억 올려 달래요. 너무해요 정말.”
전세 연장, 집주인, 2억. 겨드랑이에 넣고 있던 손이 빠지고 나도 모르게 그 말을 하는 상연씨 손을 와락 잡아버렸다. 춥디 추운 오미야콘에서 지방덩어리 돼지고기를 씹어먹다 우연히 ‘김치찌개 먹고싶네’하는 한국인 목소리를 들은 반가운 기분이었다. 상연씨는 새하얀 손으로 내 손을 포개 잡으며 ‘시드니도요?’라고 외친다. 나는 나머지 손으로 상연씨 손을 한 번 더 포개고 눈빛으로 말했다. 자, 우리 김치찌개 이야기 하러 갑시다.
그 후로 상연씨와 나는 종종 둘이 만났다. 둘 다 일을 해서 저녁시간에 카페에서 보거나 한쪽 남편이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그 집에 놀러갔다. 중학교 국어 선생님이라는 상연씨는 교사 월급으로 이 동네 살기 빠듯하다는 ‘반가운’ 고민을 털어놨다. 사실 청담동에 몇 년 간 살면서 누군가가 먼저 ‘돈’이야기를 꺼낸 건 처음이었다. 다들 돈이 너무 많아서 고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섣부른 판단이었다. 알고 보면 다들 똑같이 사는 데 티를 안냈을 뿐. 하지만 유일한 친구 상연씨와의 관계에서 위기가 찾아왔다.
그날도 상연씨랑 아파트 놀이터에 앉아 소소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상연씨에게 먼저 내가 물었다. “이번 명절에는 어디가세요?”, “아, 저는 집이 서울이라 잠깐 인사 갔다 올 것 같아요.” 사실 여기까지만 듣고 내 호기심을 끝냈어야했다. 하지만 그녀가 ‘한국관광객’인걸 한번 더 확인하고 싶은 욕심에 한번 더 묻고 만다. “본가가 어딘데요?”
상연씨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허공을 가리킨다. 뭐지? 집이 하늘에 있다는 건가? 아, 비행기를 타고 가야하는 제주도라는 건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다시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는데 우뚝 솟은 3개의 마천루가 보인다.
“아... 아이파크요?”
상연씨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러움이 매섭게 밀려왔다. 잠시 그녀에게 연민과 동질감을 느꼈던 내가 바보 같았다. 솔직히 약간 배신감도 느껴졌다. 처음 친해졌을 때 왜 말해주지 않았을까. 그날 이후 상연씨와 만나는 횟수가 줄었다. 그녀는 계속 손을 내밀었지만 뭔가 응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연락을 애둘러 거절하며 지내고 있는데, 우연히 길에서 만난 상연씨와 마주쳤다. 어색한 미소를 짓는 나에게 해맑은 미소로 나에게 다녀오는 그녀. 그녀는 먼저 커피 한잔을 제안했다. 달달한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솔직히 이야기 했다. 우리 서로 돈 없다는 이야기를 허물없이 나눴는데, 친정이 아이파크래서 좀 놀랐다고. 그랬더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 그거 말해서 좋은 꼴은 별로 못 봤거든요. 남들한테 표적만 되고. 그런데 시드니한테는 왜인지 말하고 싶었어요.”
그 말을 듣고 소설<버터>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고위층 여성들이 다니는 살롱 드 미유코라는 요리교실에 가게 된 서민출신 가지이는 이렇게 행동한다.
“우리 출신지며 출신교며 옷이며 가방을 어디서 샀는지 끈질기게 물어요. 기혼인지 아닌지. 남편 직업은 뭔지. 애인이 있다면 그 사람과 결혼을 생각하는지 아닌지. 대단하지 않나요? 아직 친하지도 않은데.” 리카는 어렴풋이 눈치챘다. 여자끼리 공유하는 음습함이 질색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누구보다 음습하고 무거운 세계를 가슴에 담아둔 쪽은 가지이 자신이다. 일대일 관계에서 자신이 우위를 점하면 초연하지만, 일단 여자들 집단에 들어가면 자기 위치를 잡으려고 우왕좌왕하는 약한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 소설<버터> 中
가지이의 행동을 보며 한 사람이 떠올랐다. 청담동 사람들 사이에서 자격지심을 느끼며 그들을 가장 외부의 잣대로 보고 있던 사람. 바로 나. 아직 이 동네문화에 녹아들기엔 외부인의 태도와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돈에 초연한 사람들은 돈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어차피 이 동네 사람들은 다들 ‘청담동 산다는’ 이유로 외부의 시선에 시달린다. (이 브런치북의 프롤로그처럼) 그러니 다들 일상 속까지 그 화제를 끌고 오고 싶지 않는 거다. 그저 가족, 아이, 운동, 맛집 등 소소하고 따뜻한 이야기만 나누며 쉬고 싶다.
상연씨와 그 일 이후 회사에서든 친구들과 있을 때든 돈 이야기를 화제로 꺼내지 않으려고 한다. 돈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들을 보면 결핍이 있어 보인다. 결핍에 대한 극복은 스스로 해야지 남들에게 떠드는 건 일상에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남의 자산상태를 들으며 자격지심만 생길 뿐. 차라리 부동산 중개인에에 찾아가 상담하는게 훨씬 이롭다. 반대로 돈이 많더라도 여기저기 떠벌리면 표적만 될 뿐이다. 상연씨도 대학생 때 아이파크에 산다는 이유로 표적이 되었다고 한다. 저 사람은 돈이 많으니까 얻어먹어도 되겠지. 부정하게 부를 쌓은 건 아닐까? 신고할 건 없나?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자위의 저서인 『드러내지 않기』에서는 현대사회에서 자신을 드러내는건 펜옵티콘의 감시망에 스스로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과 같다고 한다. 드러냄을 부추기며 스펙타클에 열광하는 곳에서 그늘도 숨을 데도 없다. 오히려 드러내지 않는 기술을 습득한 사람만이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진정한 휴식과 유쾌한 삶을 영위할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퍼거슨 감독의 명언도 (SNS은 인생의 낭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더 이상 엄마들 모임에 나갔을 때 오미야콘의 냉기를 느끼지 않게 됐다. 이 모임은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한 정보공유 목적이다. 목적에 집중하고 대화를 주도하려고 했다. 여전히 나는 추레하지만 그녀들의 광채나는 피부와 꼿꼿한 자세에 주눅이 드는 것도 그만뒀다. 어차피 자산상태는 각자 천차만별이다. 거기서 자격지심을 느끼며 눈치보느니 차라리 모임에 나가지 않는 게 낫다. 하지만 우리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는 이 모임도 필요하니 모임의 목적과 본질에 집중했다.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 삼키고 큰 목소리로 운을 띄웠다.
“그래서, 방과후는 다들 어떻게 하실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