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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Jan 29. 2024

[팀장] 저는 방법을 말하는데, 왜 비전을 물어보세요


권위적인 회의에 다녀와서 든 생각
잘하고 싶지 않다




나는 소비재 기업의 영업담당이다. “영업(營業)”이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업 또는 그런 행위를 의미한다. 제품이나 서비스를 많이 팔아서 손익을 남기는 게 영업의 숙명이자 나의 미션이다.      


영업담당자들은 숫자로 평가받는다. 시스템 구축이나 보고서 수 같은 정성적인 것으로 평가받지 않는 우리들은 매 순간 숫자를 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자원이 필요하면 돈을 끌어온다. 끌어온 돈에 대한 평가는 매출과 ROI(Return On Investment)다. 그걸로 우리부서는 포상이나 인센을 받는다.       


그런데 ’팀장‘ 자리에 오르다보니 나에게 ’비전‘을 제시하라고 성화다. 지난주에는 작년 실적을 리뷰하고 올해 목표세우는 자리에 섰다. 우리팀이 잘했던 부분, 보완할 부분을 발표하고 작년 성과를 리뷰를 하면서 올해 힘을 줘서 끌어갈 부분에 대해 설명했다.     


열심히 방법론에 대해서 말했다. 작년에 A플랫폼에 돈을 넣었을 때, B플랫폼에 돈을 넣었을 때 고객과 매출이 다른 양상을 보인다. 객단가는 B플랫폼이 높았지만 트래픽은 A플랫폼이 올라오고 있었고, 광고효율(ROAS)도 훨씬 나았다. 그럼, 올해는 B플랫폼에 투자를 해보겠다고 실무들과 다 합의한 상태였다.      

팀원들이 열심히 만들어준 자료를 보면서 우리가 왜 B플랫폼으로 가야하는지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상사가 내 말을 끊는다.

“그럴 듯 하게는 들리는데”


이때 잠시 숨을 멈췄다. 데이터를 보고 말하고 있는데 ’그럴 듯 하게 들린다‘니. 지금 내가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말인가. 내 의도가 곡해되는 것 같아 말을 멈췄다. 그랬더니 다른 상사가 말한다.

“그래서 비전이 뭔데?”     




방법론을 말하고 있는데 비전을 제시하라고 한다. 지금 나는 매출이 되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상사들은 미래의 방향성을 말하라고 한다. 미래의 방향성? 그걸 줘야하는 건 내가 아니라 나보다 더 높은 사람들 아닌가. 나는 당장 실무입장에서 돈 나오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발표가 끝나고 자리에 돌아와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럴 듯하게, 비전없이 좁은 시야로 일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넋이 나간 채로 컴퓨터 화면만 보고 있는 나를 내 직속상사가 부른다.

“작년에 잘해서 그래. 잘해서 거만해질까봐 저렇게 말씀들 하는거니까 맘에 두지마라.”    

 

죄송하지만, 저 회의에 들어갔다온 후 잘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애초에 거만해진 적도 없다. 세상은 넓고 모래알처럼 많은 소비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서 답답해 죽을 것 같은데, 거기다가 사기를 떨어트리는 회의에 갔다오니 잘하고 싶지 않아졌다.



내가 왜 잘해야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기성세대들의 화법



동일한 회의에 다녀온 팀원들이 단톡방에서 떠들고 있다.

“팀장님이 잘 말씀해주셨어요. 저희도 막혔던 부분인데 설명 잘 해주셨어요. 감사해요.”

팀원들을 생각하면 잘하고 싶은데, 왜 상사들을 생각하면 잘하기 싫어지는지 미스테리다. 나를 평가하는 사람들은 상사고, 그들에게 알랑거리면서 잘 해야하는데 왜 잘하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지는지 나도 나를 모르겠다. 매를 들고 채찍질을 하면 일어나서 투지를 불태우는 시대는 끝났다. 일단 MZ세대의 첫째격인 나부터, 매를 맞으면 포기하고 싶어진다.      


칭찬 받고 싶다는 말이 아니다. 그냥 바라는 건, 믿어주고 냅뒀으면 좋겠다. MZ세대들은 회사를 평생 다닐려고 회사에 가지 않는다. 온전히 “경험치”를 쌓으려고 회사에 간다. 나도 그렇다. 실무와 동떨어진 상사들이 할수 있는건 MZ들의 경험치를 간접체험으로 습득하고 종합적으로 사고해서 구체적인 방향과 비전을 제시해야한다.  비전까지 MZ들에게 요구할거면, 선배님들은 회사에 뭘 하러 오시는 건지 묻고 싶다.      



이 회의를 한 주에 송길영 작가의 <핵개인의시대>라는 책을 탐독했다. 이 책에서 권위에 대해 나온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권위는 인정을 기반으로 합니다. 수용자가 인정하지 않으면 권위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권위를 유지하려는 사람도, 권위를 찾는 사람도 원하는 것은 합당한 인정입니다. 정당한 인정이 권위의 출발점 인 것입니다. 위로부터 아래로 억압된 기제로 유지되던 권위주의 시대를 지나 이제 개인이 상호 네트워크의 힘으로 자립하는 새로운 개인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저 회의는 권위주의 시대 그 자체였다. 개인을 깎아내리기 위한 목적 외에 어떤 목적이 있는가. 가장 End user의 정보가 담긴 데이터를 가지고 설득력 있게 자료를 만들어 말하고 있는데, 그럴 싸한 실체없는 내용이라니. MZ들이 제시하는 ’그럴 듯한 정보‘에 대한 기성시대들의 재해석은 궁금하다.


사실 알고 있다. 그들이 대안이나 방향을 내놓지 못할 거라는 걸. 장사도 장사꾼이 알지 원님 나으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이럴 때는 장사꾼에게 한번 잘 팔아보라고. 널 믿는다고 하는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솔직히 경험의 의미가 실종된 시대에 원님들의 과거 경험은 쓸모가 없다. 어떻게든 쓸모가 있어보려고 발버둥 치는 건 알겠지만 지금 당신의 경험은... 슬프지만 방법과는 동 떨어져있다. 이럴 때 권위와 위엄을 지키고 싶다면 조금 다른 리더십을 고안해보시길. 하나도 안 멋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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