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너무 세게 말했나.”
저녁 6시 15분, 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다. 퇴근시간이라서 그런지 10초 단위로 사람들이 점점 쌓인다. 도미노가 놓이듯 늘어나는 인파 사이에서 갑자기 강풍에 몰아치는 너울성 파도처럼 후회가 확 밀려든다. 아무리 기분이 상했어도 그 정도로 말할 필요는 없었는데. 손목만 잡으면 되는 걸 멱살을 잡아버린 회의가 생각난다. 다시 생각해보니 한 손으론 멱살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뺨도 때린 것 같기도 하고.
10분 정도 기다린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고 이미 전 정류장에서 승객을 가득태운 버스가 내 마음을 조급하게 한다. 필사적으로 뛰어가서 승차카드를 찍으려는데, 내 뒤에 줄을 서있던 사람이 내 어깨를 확 밀며 먼저 카드를 찍는다. 어이없는 순간도 잠시, 자아성찰하던 마음이 분노로 바뀐다.
“근데, 그 무례한 말에 난 왜 웃었지.”
침묵이 길어지거나 분위기가 어색해지면 피식, 웃어버리는 습관이 있다. 아까 웃지 말았어야 했는데, 웃을 상황이 아니었는데. 내가 개그맨도 아닌데 굳이 왜 거기서 농담을 하면서 넘어갔을 까.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간다면 절대 웃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런데 비슷한 생각을 불과 며칠전에도 했던 것 같은데 난 왜 또 같은 후회를 하고 있는 거지?
그 이유는 내가 관성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20년 동안 자신들만의 철학으로 날 키워주셨고, 대학, 사회생활하는 동안 내가 나를 이렇게 키워왔다. 약 몇십년 동안 만들어진 나는 바뀌기가 쉽지 않다. 그런 이유로 항상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고 같은 후회를 한다. 언제 나는 후회를 안 할 수 있을까.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데 앞자리에 앉은 승객의 하얀 목덜미가 눈에 들어온다. 흰 목을 더 두드러지게 하듯 새겨진 짙은 글자들. 고운 피부에 상처를 내면서 새겨야 했던 저 말의 뜻이 궁금해졌다.
Faber est suae quisque fortunae
저 문장의 뜻을 확인하고, 가방에 있던 다이어리를 꺼냈다. 평소 새기고 싶었던 말 10문장을 쫙 적어 내려갔다. 이 문장들이 있다면, 아마도 지금보단 훨씬 내가 나아지지 않을까. 아니, 더 나아지진 않더라도 퇴근길마다 후회로 가득 찬 상태로 집에 돌아가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퇴근길 새기는 마음, ‘퇴근 타투’ 연재를 시작합니다.
Faber est suae quisque fortunae
모든 사람은 자기 운명의 장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