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휘두르려는 것들에 대항하는 한 단어
Ubiquitous
당신은 날 잡아둘 수 없다
살면서 들은 말 중 가장 황당한 말은 나에 대해 단정하는 말이었다. 보통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과하게 진지하고 넘어갈 수 있는 가벼운 상황에서 각을 잡는다.
"내가 너를 오래봐서 아는데, 넌 이래. 너는 000한 사람이야."
그런말을 들으면 한 가지 생각이 든다.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당신이 나를 안다고?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지? 갸우뚱 하며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물으면, 거기서 돌아오는 답은 찰나의 순간에 그의 눈에 들어온 어떤 모습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단편적인 모습을 보고 성급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을 본다. 나를 어떤 것으로 정의를 내리면서, 어떤 프레임 안에 집어 넣으려고 한다. 인간의 지능은 모든 걸 다 알수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시시비비를 나누고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안에서 타인을 정의한다. 그래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을 끌어갈 수 있으니까. 슬프게도, 대체적으로 그 정의는 편협하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를 정의하려고 하면, 그와 반대되는 모습이 있음을 일부러 보여준다. "넌 착하잖아." 라고 하면 순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넌 야망이 있어."라고 하면 그날은 꼭 칼퇴를 한다(겨우 이걸로 라는 생각은 들지만). "넌 인간관계가 좋아."라고 하면 어떤 사람들과는 각을 세울 수도 있음을 보인다. 이렇게라도, 나라는 인간이 한 가지 문장으로 모아지지 않는 사람임을 보여주고 그 사람의 인식에 불안정성을 심어준다. 그래야 나를 휘두르려다 포기하니까.
특히 이런 노력이 빛을 발할 때는 인사시즌이다. 조직은 구성원의 의견을 묻지 않고 사업 방향과 조직계획에 맞게 사람들을 이동시킨다.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조직인들은 물건이 아니므로 최소한의 의중을 묻거나 선택지는 줘야한다. 하지만 정의가 되어버린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갈지도 모른 채 불안함에 떤다. 상대에게 줘야하는 불안감을 자신이 안고 있는 것.
유비쿼터스
ubiquitous
언제 어디서든 존재한다는 라틴어다. 몸이 회사 안에만 있으면 회사에 의해 정의되는 사람이 된다. 회사가 없으면 나도 없어지는 그런 사람. 회사는 무생물이라 감정이 없어서, 언제든 나를 내다 버릴 수 있다. 내가 아무리 대단한 성과를 낸 사람이라도 하더라도, 나를 대체할 사람은 수십명이다. 자비없는 회사에서 나를 지키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끊임없이 회사 바깥에 있는 것들과 연결되며 회사가 나를 정의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저 사람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조직에 매몰된 사람이 아니라 미래적인 사람이다. 외부의 점선면들과 끊임없이 연결되며 조직이 나를 단정짓지 못하게 하는 것이 거대한 회사에 작은 개인이 대항 할 수 있는 작은 무기다.
나를 정의하는 건, 나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