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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Nov 13. 2019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좋겠다

이대로 멈춰라

아이를 낳고 나서 새롭게 알게 된 세상과 기분 좋은 변화에 대해 기록하고 소회를 적습니다.





사랑 그까짓게 뭐라고, 꿈이 더 중요하지.

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사랑을 맹신하게 되었다. 



브런치에 연재하고 있는 글의 테마는 사랑이다. 사랑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니, 누군가 물었다. 너는 그동안 인생이 행복했냐며. '그동안'은 세상에 태어나면서 지금까지를 묻는 듯했다. 그럴 리가 있는가. 나도 세상이 끝나버리길 바라던 시절이 있었다. 10년 동안 품어온 꿈에 도전 중이었고 최종 결과에는 계속 불합격이 떴다. 눈 앞에 불(不)은 불(火)이 되어 지친 열정이 아닌 기름칠된 분노로 붙었다. 세상에 화가 났다. 간절히 원하면 이뤄준다고 하지 않았는가. 왜 나에게 거짓말을 했는가. 하필, 왜, 나에게.


<잘가, 마봉춘... PD는 내길이 아닌가봐>


그 해 치러진 모든 시험을 탈락하고 서점으로 갔다. 백수의 장점은 사람이 없는 시간에 조용히 책을 볼 수 있다는 것. 텅 빈 서점을 서성이며 모든 카테고리의 책들을 들었다놨다 하고 있었다. 그때, 베스트셀러 진열장에 한 책이 눈에 들어왔다. '스물아홉 살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 책의 내용은 꽤 감동적이다. 저자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자존감을 1년간의 경험을 통해 드러내고 있었다. 내 상황이 그래서였을까, 책을 완독 했는데도 제목만 머릿속에 남았다. 나도, 스물아홉 살이 될 때까지 이상태라면 삶의 종료 버튼을 눌러야 하나 싶었다.


그날부터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살았다. 채용사이트에 뜨는 아무 기업에 원서를 넣고 아무 기업에 들어갔다. (들어와서 알았지만 엄청 큰 회사였다. 물론 당시 나에겐 의미가 없었다) 흘러가는 대로 되는대로 살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회사가 하라는 대로 했다. 야근과 격무로 동기들이 퇴사하네 마네, 상사 뒤통수를 치네 마네하며 입을 삐죽이고 있을 때 불평 없이 일만 했다. 겉으로 보면 성실한 신입사원이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시커먼 좌절과 자괴감이 가득 차있는 괴물이었다. 불평 같은 '소소한' 감정은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없었다.    


회사는 불평 없이 묵묵히 일하는 사람을 좋아했다. 상사는 나에게 꽤 큰 프로젝트를 맡겼다. 내 연차에 맡긴 꽤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냥 했다. 내 인생은 이미 틀렸으니까. 내가 결정하지 말고 주변에 완전히 휘둘리자는 생각이었다. 프로젝트 규모가 커서 그런지 매일매일 사건사고가 터지고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편했다. 더 이상 이루지 못한 꿈이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하는 일이 '내 일'이 되어갔다.


그 시기에 그 사람을 만났다. 동그랗게 처진 눈에 푹 파인 보조개를 가진 남자. 안구 한가득 나에 대한 호감과 사랑이 품어 나와 그의 눈만 봐도 익사할 것 같았다. 남자는 날 정말 사랑해줬다. 터진 보자기에 쏟아지는 햇콩처럼 떨어지는 사랑을 받아먹다 보니, 어느새 내 안에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던 시커먼 것들이 사라져 갔다. 그가 청혼하던 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하려고 그렇게 시험에 떨어지고 이 회사에 들어왔나. 세상은 나의 행복을 원할 테니까.


1년 간의 신혼생활이 지나고 우리에게 기다리던 생명이 찾아왔다. 막 태어난 아기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 봐도 바로 아빠를 찾을 수 있을 만큼, 아빠와 쏙 빼닮았다. 우리는 가족이 되었다.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습진이 올라오고 아토피 진단을 받아 평탄한 육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닥치는 어려움은 의료기술과 여러 경험자의 조언으로 잘 이겨냈다. 무엇보다 남편이 곁에 있었다. 이 사람이랑 같이 있다면 난 무조건 행복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그의 안구는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상을 저주하던 나는 이제 이렇게 기도한다.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 주세요. 오늘도 평온하고, 내일도 평온하길. 우리 가족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소소하게 이루고 싶은 꿈은 여전히 있고 성공하고 싶고 부자도 되고 싶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우리 가족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그저 지금의 작은 행복과 건강이 우리 곁에 있길 간절히 기도한다.  


29살에 삶을 어떻게든 종료시켜보려 했던 나는 이제 30대 중반이 되었다. 내가 만약, 고작 20대에, 삶을 우연으로만 경험해놓고 종료시켰다면 아찔하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면 이 이야기는 해주고 싶다.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고 각 이정표마다 다른 방식의 행복이 널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너의 입에서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좋겠다"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이 꼭 찾아올 거다.

 


< 속초가는 길 발견한 표지판. 인제 신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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