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의 뾰족한 하루
회사에 갔다.
동료가 커피를 사줬다.
동기랑 메신저를 했다.
화장실에 갔다.
정신없이 일을 했다.
오전시간이 너무 안 간다.
기분이 뭐 같다.
[회사에 갔다]
번호도 안 보고 정신없이 버스를 탔다. 교통카드를 찍고 나서 정류장 노선도를 보고 나서야 다행히 제대로 탔다는 걸 알았다. 머리를 감고 나와 스킨로션을 바르는데 회사에서 전화가 걸려왔고, 화장도 거의 못한 채 끌려 나오듯 집을 나섰다. 거래선에 보낸 제품이 통관에 걸려있다는 전화였다. 연말 실적을 맞추기 위해 급하게 보낸 물량이라 통관에 걸려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일단 현지 코디네이터와 연락을 해서 현지 세관으로 가달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정신을 차려보니 회사 엘리베이터다. 아직 근무시간 9시가 채 되지도 않았는데 하루가 전부 지나가버린 것 같다.
[동료가 커피를 사줬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책상 위에 별다방 커피가 한 잔 놓여 있었다. 목이 덜 풀린 상태에서 전화기에 말을 쏟아냈더니 목이 타오르듯 아팠다. 은은한 에스프레소 향이 풍기는 따끈한 커피를 얼른 들이켜고 싶었지만 내 것이 맞는지 확신이 없었다. 가끔 실장님이 직원들에게 커피를 돌리시는데 그건가 싶어 주변을 수소문해 봤지만 아무도 커피의 출처를 알지 못한다. 일단 무심하게 두고 업무를 시작하려는데 얼마 후 내 옆자리 김대리님이 자리로 오면서 말했다.
“제가 사드린 거예요. 지난번에 감사해서요.”
김대리님이 대표로 가야 하는 거래처가 있었는데,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라 연차가 더 있는 내가 같이 간 적 있었다. 그날 유독 비가 많이 와서 홀딱 젖었는데, 그게 고마웠나 보다. 오늘은 왠지, 좀 따뜻한 날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동기랑 메신저를 했다.]
회사 메신저 로그인을 하니 못생긴 동기로부터 메신저 와있다.
“너 주식 안 하냐?”
“하지, 인마.”
“하이닉스 안 샀어?”
“나 코스닥해...”
“아...”
탄식이 몰려온다. 나도 안다. 모두가 S&P와 코스피를 외칠 때 코스닥으로 간 비주류. 어쩌겠는가, 남들 다 한다는 주류에는 도저히 손이 가지 않는 걸. 내 마지막 코스피 종목은 삼성전자였다. 분할 후 6만 원에 물렸다가 7만 원이 되자마자 전량 매도했다. 그리고 그 돈을 그대로 코스닥 대표주자인 오천당 제약에 넣었다. 그 결과는, -x0%. (내 인권을 위해 수익률 비공개)
[화장실에 갔다.]
모니터에 흘끗 비친 추노가 공포스러워 화장 파우치를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파우더룸 앞 거울에 서있는데 잠수부 같은 원피스를 입은 한 과장님이 어린 여자애들 3명을 몰고 들어온다.
“나 예전에 소개팅한 남자가 하이닉스였는데, 아오 아까워. 자기들은 꼭 하이닉스 다니는 남자 만나. 나처럼 월급쟁이 만나지 말고. 호호호호.”
의사랑 결혼했으면서 위선을 떨고 앉아있다. 그나저나 하이닉스가 핫하다. 화장실, 엘베, 카톡방 모두 하이닉스 성과급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하이닉스는 현대 계열사였다는 정도? 어차피 나와 어떤 관련도 없으니 빨리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는 게 상책이다.
[정신없이 일을 했다.]
잠시 숨을 돌리는데 현지 거래선에게 메일이 와있다. 다행히 안전하게 통관이 될 것 같다고, 여기서 챙겼어야 했는데 미안하다는 메시지였다. 그제야 커피가 눈에 들어왔다. 알맞게 식은 커피를 한 모금씩 들이키며 복기를 해본다. 우리가 배를 띄워서 물건을 보냈으면 그쪽에서 규제에 맞게 물건을 잘 인도해야 한다. 다만 현지 거래선도 영업에 특화된 경우가 많아 규제 관련 서류처리가 미비할 때가 많다. 이럴 때 서로 잘 챙겼어야 했지만 연말 실적이 급했었다 보니 서로 놓쳤다. 미리미리 매출을 하면 되는데 왜 하필 연말만 되면 회사는 사람을 달달 볶는지. 급성 스트레스에 신물이 올라오는 것 같아 다시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켠다. 마시는 소리가 조금 컸는지 김대리님이 말을 건다.
“고생이 많으세요.”
“아, 아니에요. 커피 감사해요. 최고의 위로였어요.”
김대리님은 옅은 웃음을 짓더니 본인 모니터 쪽으로 몸을 돌린다.
[오전시간이 너무 안 간다.]
거래선에 보낼 서류를 차근차근 정리하고 있는데 아까 그 못생긴 동기가 또 말을 건다.
“그거 알았어?”
“아 진짜- 너 때문에 집중 안되잖아.”
“너 옆자리 김대리님...”
“아, 김대리님? 왜? 무슨 일 있어?”
“남편이 하이닉스 다닌대. 이번에 성과급이 x억이래.”
“헉. 진짜? 안 그래도 아침에 커피를 사주셨어.”
“뭐? 고작 커피?? 한턱 내라 해!”
타인의 성과에 어떤 기여도 하지 않은 채 돈을 내놓으라는 약탈적 자본주의 발상을 혐오하지만, 그게 제일 친한 동기라니. 내 인맥의 수준이 개탄스럽다. 하지만 더 개탄스러운 건 내 주식 잔고다. 한 인간을 인맥과 주식으로만 평가한다면, 나는 C등급 이하일 것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 슬프고도 지독한 일상을 못생긴 동기와 해학으로 이겨내는 내가 싫지 않다. 비록 실패로 점철된 인생이지만, 하루하루 어쨌든 나아가고 있으니. 사자성어로 치면 수적천석(水滴穿石)일까. 물방울이 아니라 내가 돌이라는 게 문제지만.
시야 한켠에 마른 몸을 곧게 세우고 타자를 치는 김대리가 보인다. 내가 부실주면 그녀는 우량주일 것이다. 완벽하게 세팅된 외모와 업무 능력, 그리고 배우자의 소득까지. 그런데 이상하다. 그녀가 부럽지 않다. 수더분하고 주변 사람들을 간간히 챙기지만, 정이 가지 않는다. 미소 뒤에 싸늘한 무언가가 숨어 있는 느낌. 같은 부서가 된 지 두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는 극존대를 하는 사이다. 그래도 오늘 커피를 얻어마셨으니 가방 속 단백질 쿠키라도 건넬까 타이밍을 재고 있는데, 그녀가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튀어 사라진다.
[기분이 뭐 같다.]
무슨 일인가 싶어 잠시 눈을 돌려 그녀의 모니터를 본 순간, 나는 아까부터 계속 싸했던 감정의 실체를 알아버렸다.
그녀의 메신저 창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그냥 1+1 쿠폰 있는데 버리기 아까워서 한잔 더 사 왔어. 이 아줌마가 나 동료평가 할 거 아냐. 미리미리 손 써놔야지ㅋㅋㅋㅋ.
tmi. 못생긴 동기는 남자입니다. 자주 등장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