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었다.

by 시드니


부서 점심이다.

메뉴는 알탕이다.

밥을 먹었다.

커피는 내가 샀다.

담소를 나눴다.




[부서 점심이다.]

“오늘 부서 점심인 거 알지?”

부장님이 어디선가 나타났다. 얼마 전까지 나와 나란히 과장 자리에 앉아있던 김 부장은, 당시 부장이 불미스러운 일로 징계를 받아 공석이 생기면서 그 자리를 채우게 됐다. 정기 개편 시즌이 아닌 터라 급하게 보직을 맡은 그는 ‘좋은 리더가 되는 법’ 같은 책을 잔뜩 사와 읽더니, 갑자기 월요일마다 부서 점심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좋은 리더는 부서원의 점심시간을 휴식 시간으로 보장해 주는 사람이라는 걸 말해주고 싶었지만, 첫 보직 생활로 의욕이 넘치는 그의 기를 꺾을 순 없었다. 하필 오늘은 나서기만 해도 찬 공기가 폐부를 찌르는 영하 10도의 한파다. '굳이 이럴 때 나가야만 속이 후련하겠냐!'라고 쏘아붙이고 싶지만, 나는 15년 차 프로 직장인이기에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대답한다. “뜨끈한 국수 드실래요?”


[메뉴는 알탕이다.]

육수가 팔팔 끓는 솥단지에 찰진 밀가루 면을 던지고, 표면에 광택이 생기면 그 위로 고기와 야채를 풍성하게 넣어 한소끔 끓인 뒤 오목한 그릇에 덜어 후루룩 마시는 그림을 상상했건만. 점심 메뉴는 결국 알탕이다. 이건 초반에 포지셔닝을 잘못한 내 탓도 있다. 처음 부서 점심을 먹었을 때, 유일한 젠지(GenZ)인 이 사원이 ‘제육볶음 먹겠습니다’라고 선창하니 다음으로 어린 김 대리가 ‘저는 돈가스요’라고 새침하게 말했다. 당당하지도, 그렇다고 새침하지도 못한 나는 빼곡하게 글씨가 쓰인 메뉴판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알탕이 먹고 싶긴 한데, 2인분부터네?’라며 중얼거리는 부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땐 몰랐다. 그 잠깐의 망설임이 매주 월요일마다 알탕과 마주하게 할 줄은.




[밥을 먹었다.]

부장님은 알만 달라는 내 요구를 무시하고 이리를 잔뜩 얹어준다. 소위 명란으로 불리는 길쭉한 알을 좋아하지만, 여자는 이리를 먹어야 한다며 앞접시가 넘치도록 부어주는 부장. 그는 담백한 알을 씹으며 주말에 아들 축구 라이딩을 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중학생 아들이 유소년 축구팀 소속인데, 주말마다 지방 경기가 많아 여기저기 다닌다고 한다. 처음에는 신기해서 들어줄 만했지만, 매주 반복되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리액션도 지쳐간다. “우와, 진짜요?”, “아하….”


본인 이야기에 반응이 시들해지자 부장은 냄비에 남은 알탕을 김 대리에게 덜어주며 묻는다. “희은 씨, 이리가 어딘지 알지? 내가 알려줬지?”라며 음흉하게 웃는다. 우리 셋은 이리가 어딘지 알고 있다. 알탕을 먹으러 온 첫날부터 이리가 생선의 정소(精巢)라는 걸 그가 몇 번이나 강조했으니까. 두 사람이 더욱 알탕을 피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밥상머리에서 배려 없는 농담이나 던지는 사람과 메뉴를 공유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이상한 소리 좀 그만하라고 쏘아붙이고 싶지만, 최고의 복수는 방관이라는 격언을 되새기며 언젠가 내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시체로 둥둥 떠내려올 김 부장을 상상한다. 갑자기 밥맛이 돌아 남은 밥을 싹싹 긁어먹었다.


[커피는 내가 샀다.]

점심은 각자 결제하고 거리로 나왔다. 보통 부서 점심을 하는 날엔 부장님이 메가커피를 사주곤 했는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김 대리가 새로 생긴 카페에 가보자고 한다. 외관만 봐도 가격대가 느껴지는 인테리어였다. 키오스크 앞에 서서 메뉴를 고르는데 카드를 쥔 부장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눈앞에는 6,000원짜리 아메리카노를 터치하는 김 대리의 모습이 보인다. 분명 김 부장이 상사고 김 대리가 부하직원이지만, 이 광경은 김 부장에게 꽤나 폭력적으로 보였다. 알탕을 먹으며 없는 형편에 아들 축구 뒷바라지하느라 힘들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늘어놓았는데 기어코 메가커피 세 잔을 살 돈으로 커피 한 잔을 고르는 김 대리의 패기에 경외감을 느낀다.


오전에 김 대리에게 얻어먹은 커피도 있고 결제판 앞에서 서성이는 부장이 불쌍해 먼저 카드를 내밀었다. 내가 한 발짝 나서자 공포 영화를 보듯 벌벌 떨던 부장은 갑자기 어벤져스라도 된 양 스파이더맨처럼 폴짝 뛰어 키오스크 옆으로 비켜선다.

“내가 사야 하는데. 아, 정말. 신 과장 역시!”

결제하기 편하도록 공간을 확보해 주는 부장이 눈물 나게 고맙다.


[담소를 나눴다.]

점심 내내 50대 아저씨의 이야기만 들었으니 카페에서는 20대 이 사원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주말에 뭐 했냐는 물음에 이 사원은 서촌에 다녀왔다며 요즘 풍경을 들려준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덕분인지 길가에 한국 유적 관련 굿즈가 즐비하고, '사자보이즈' 코스프레를 하는 관광객도 보인다고 한다. 역시 진짜 서울은 사대문 안이라며 나도 광화문 근처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나누던 중 진동벨이 울린다. 보통은 얻어먹는 사람이 벨을 들고 오지만 이 사원은 자리를 맡으러 가버렸고 부장은 벨의 존재조차 모른다. 김 대리는 팔짱만 낀 채 먼 산을 보고 있어 결국 벨은 내 손에 들어왔다. 뭐 상관없다. 누가 들면 어떠하리.


진동벨을 커피 네 잔과 바꿔 들고 자리로 돌아오는데 김 대리와 이 사원이 나를 선망하듯 바라본다. 그 옆에서 고른 치열을 다 드러내며 손짓하는 부장. 무슨 이야기를 했을지 뻔하다. 아, 자리를 비우지 말았어야 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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