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에 대한 고찰

스스로 이름 짓기

by 빛길

윤 로 빈.
아빠의 아빠가 지어준 내 이름이다.
흔하지 않은 이름 덕분에 "이름을 누가 지어줬어요?", "이름이 참 예뻐요."같은 말은 수없이 들었고 미국교포냐, 가명을 쓰는 것이냐는 질문도 여러 차례 받아보았다.

나는 내 이름을 좋아한다.
어딘가 이국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 영어 이름같기도, 한글 이름같기도 하면서
한자 뜻을 가지고 있는 반전이 좋다.
로빈 로빈 로빈. 반복해 말할 때 혀가 굴러가는 느낌이나 'ㄹ'이 주는 음가 특유의 발랄함이 좋고
로빈 후드, 로빈슨 크루소, 만화 <원피스>의 로빈 등 내 이름때문에 생기는 유치한 별명들이 좋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내 이름의 의미는 썩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내가 태어나기 전 외가식구들은 작명소에 가서 몇 개의 이름을 받아왔다.
여러 이름 후보들이 있었으나 아빠의 아빠가 우리 엄마에게
"아가, 내가 아기의 이름을 지었다. 이름은 로빈인데 어떠냐?"
라는 말을 했을 때 엄마는 그 이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아빠의 아빠가 밤새 옥편을 뒤적이며 만든 이름이었고
그렇게 나는 로빈이 되었다.

원래 내 이름의 한자는
다스릴 윤尹, 방패로 櫓, 계집 빈 嬪을 쓴다.
'단단한 방패처럼 세상의 모든 어려움과 풍파를 막아내는 사람이 되라'라는 의미였는데
열 세네살 무렵부터 이 이름의 뜻이 어딘가 찜찜했다.
'막는다'라는 '방패'의 쓰임이 주는 수동적 느낌과, 계집'이라는 성정체성이 이름에 들어가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방패 아이'라는 것이 왠지 나는 평생 어려움을 막다 끝날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고심 끝에 나는 아빠의 아빠가 그러했듯 옥편을 뒤적였다.
어떻게든 '로빈'이라는 이름을 쓰면서도 한자 뜻을 붙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찾은 한자가
길로 路 빛날빈 彬 이었다.
'내 인생길을 닦고 빛내자.'라는 의미로
요행을 바라지 말고 스스로 반짝이는 길을 만들자는 다짐을 담아 다시 만든 이름이었다.
비록 등본 상에는 그렇게 적혀 있지 않지만
나는 지금도 내 소개를 할 때나 내 이름을 쓸 때 길로 路 빛날빈 彬자를 쓴다.

누군가 나를 위해 지어준 이름도 감사하고 의미가 있지만
내가 나를 위해 지은 이름을 쓴다는 것 역시 의미가 깊다.
어린 윤로빈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이름 뜻을 바꾸고자 고심했던 엉뚱함이
새삼 귀엽고 기특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 때의 나는 지금보다 나를 더 많이 사랑하고 돌봐주었구나.
어린 날의 내가 지금의 나를 기대하고 꿈꾸며 지어준 이름.
그에 담긴 염원을 마음에 새기며 나를 더 사랑하고 부끄럽지 않은 인생길을 닦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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