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나에게, 나는 당신에게
1
나에게 계절은 심상으로 떠오른다.
특히 요즘 가로수 사이를 걸으면 초여름을 실감할 수 있는데
나에게 여름이란 가로수의 넓은 잎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햇빛,
또한 그것이 걸을 때마다 시시각각 다른 모양새로 쏟아지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참 많은 것들을 사진처럼 하나의 심상으로 기억하고 있다.
사람에 대한 기억 역시 마찬가지인데
누군가 나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던 순간, 그 사람이 매력적으로 보였던 순간, 그이를 통해 상처를 느꼈던 순간 등, 잠깐 사이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그 사람의 어떤 것이 곧 그 사람으로 기억된다.
선생님이 자주 하시던 곱창 머리끈, 그 아이에게 잘 어울렸던 베이지색 스키니진,
아르바이트했던 식당 사모님의 검은색 뿔테 안경, 짝꿍이 종종 꺼내던 비염약.
때로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그러나 내게는 인상 깊던 사소한 부분이 그 사람의 전체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2
그러다 보면 반대로 어떤 심상이 특정한 사람, 특정한 상황을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엄마 손 파이, 오곡 쿠키 같은 상자에 포장된 비스킷 종류가 그렇다.
어릴 때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나를 위해
엄마는 간식거리로 그런 과자들을 사두셨다.
그때는 입이 짧아 그런 것들을 잘 먹진 않았지만
그래도 집에 먹을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나름 안정을 주었던 것 같다.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화장대 서랍 사이에 고이 접어놓은 엄마의 비상금,
엄마의 퇴근이 늦어질 때마다 저녁식사를 해결했던 집 근처의 김밥집,
불 꺼진 집의 침대에 누워 보던 애니메이션, 그리고 그것이 벽에 반사되어 만들어내는 요란한 불빛.
그런 것들을 떠오르게 하는 비스킷 상자는 내게 '일하는 엄마의 불안', '집 지키는 아이의 성숙'이다.
3
또 동그랗고 작은 지우개를 보면 내가 중학생일 때 짝꿍이던 S가 떠오른다.
S는 공부를 아주 잘 하는 친구였는데 성격이 예민하고 짜증이 많아서
아이들이 '재수 없다'라고 수군대던 아이였다.
그러나 걱정했던 바와 달리 나는 S와 짝꿍을 한 후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장난도 치며 나름 재미있게 지냈던 것 같다.
어느 날 내가 지우개를 잃어버렸는데
건망증이 심해 지우개 가져오는 일을 잊고는 매번 S에게 지우개를 빌렸다.
그렇게 3일쯤 지나자 S가 나에게 지우개 좀 가지고 다니라며 심하게 짜증을 내는 것이었다.
내가 잘못한 것이 맞는데 S의 짜증에 괜히 나도 토라져 "쪼잔하다"라는 말을 뱉고는
하루 종일 S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속으로는 '역시 아이들 말이 맞았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몇 교시가 지나 갑자기 S가 삐뚤빼뚤 쓴 쪽지와 함께 반을 자른 지우개를 내미는 것이다.
쪽지에는 자신이 짜증을 내 미안하다며 앞으로 이 지우개를 쓰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를 더욱 미안하게 만들던 S의 사과, 그 후 깨달은 소문의 무지.
작은 지우개는 나를 더욱 미안하게 만들던 'S', 그리고 '귀여운 다툼'이다.
4
그런데 내가 하나의 심상으로 떠올리지 못하는 존재는 나 자신이다.
가장 가깝게 붙어 있기에 매번 다른 모습을 속속들이 볼 수 있고
매번 발견하는 의외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혼란들이
자아에 대한 심상을 형성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날은 발에 박힌 굳은살로 기억되다가도,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누워 있는 침대로 기억되기도 한다.
어떤 날은 시도 때도 없이 흘리는 눈물로 기억하는데, 또 어떤 날은 차가운 눈과 입으로 기억되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어떤 심상도 온전히 나를 설득하지 못하고
그래서 더욱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나는 어떤 심상으로 기억되고 있을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물론 그 심상들 역시 나를 설득하지는 못할 테지만.
5
또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내가 가진 기억과 그것이 만들어낸 심상이 모두 다 내가 아닌가하는 의문이 든다. 그들이 모여 나에게 영향을 주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낸 것일테니까.
앞서 적었던 엄마의 비스킷이나 S의 지우개같은 것들이 나를 성숙하게 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든 것처럼.
그렇다면 나이고 싶지 않은 심상들에 굳이 얽매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억지로 만든 약속, 의무적인 사랑, 기준이라 일컬어지는 것들과 은혜로 포장된 욕심같은 것들.
또한 그것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들에 말이다.
나에 대한 심상을 떠올려 본다.
나에 대한 심상을 만든 이들을 떠올려 본다.
나에 대한 심상을 만든 이들에 대한 나의 심상을 떠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