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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령 Nov 24. 2020

톰 소여의 모험, 현실판


1. 살신성인

 톰 소여의 모험 내용 중에 페인트칠 이야기가 나온다. 동생을 괴롭힌 벌로 페인트칠을 하게 된 톰은 꾀를 냈고 친구들은 여지없이 걸려들었다. 더구나 전략적으로 포장된 멋짐 투성이의 페인트칠이 너무하고 싶었던 친구들은 가진 물건까지 아낌없이 내놓았다. 뜻밖에도 현실판 톰 소여의 모험 이야기가 바로 눈앞에서 펼쳐졌다.

     

 갑자기 결정된 이사를 앞둔 어느 날. 시간과 경제적인 이유로 베란다와 새시, 욕실 등 꼭 필요한 곳을 제외한 나머지 인테리어는 생략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화려한 주방의 한쪽 벽이 내내 눈에 거슬렸다. 고민 끝에 셀프 인테리어에 도전! 문제의 벽을 직접 칠하기로 했다. 시누이가 흔쾌히 돕겠다고 했다. 늘 곁에서 많은 일을 함께 해준 시누이를 페인트 노동에까지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혼자 칠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녀를 위해서. 우렁각시처럼~ 아니지? 여기는 우리 집이니까... 나는 언니다. 그러고 보니 톰도 동생이 있었는데... 동생을 괴롭히다가...  

    

 유난한 컨디션의 난조라는 문제가 있지만, 사실 나는 이 분야의 문외한이 아니다. 기본 이상이라서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처음 롤러를 벽에 대는 순간, 아! 큰일 났다 싶었다. 만만해 보였던 벽은 축구장만 했다. 한 번도 힘든데 마르면 또다시 칠해야 한다. 죽을 만큼 힘들었다.

     

 오전 10시쯤 시작한 일이 오후 6시에 겨우 끝났다. 페인트는 줄줄 흐르고, 묻고, 튕기고, 쏟고 난리도 아니었다. 난장판이었지만 완성된 벽은 자세히 안 보면 꽤 잘 칠한 듯 보였다. 작업한 벽을 보고 온 남편은 전문가에게 맡긴 줄 알았다고 했다. 한마디로 작품이라는 것이다. 암만 그래도 다시는 못할 일이었다. 절대로.  

왼쪽-내가 사용한 의자. 오른쪽-남매가 사용한 의자

2. 어라! 청출어람

 다음 날, 페인트칠하러 출동한 시누이는 내 위대한 작품인 벽 앞에서 묘한 표정을 지었다. 혼자 고생했다고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좀 생뚱맞다. 그녀는 멀쩡한 거실 벽에 가서 트집을 잡고 있다. 여기도 칠해야 할 것 같다고. 내가 째려보았다. 그랬더니 내 귀를 의심할 “나도 칠하고 싶었다고~” 한다. 기가 찼다. 세상에! 나는 일이 싫다. 최대한 안 하려고 잔머리를 굴린다. 그런데 안 그런 사람이 있다. 참 특이한 종족이다.

     

 순전히 그녀를 위해 페인트를 한 통 또 샀다. 두 번째 구입이다. 다시 실내 페인트 공사가 화려하게 재개되었다. 비가 왔지만 친환경 페인트는 전혀 날씨에 개의치 않는다. 일이 여기서 끝나면 이야깃거리도 안 된다.

시누이가 조금 칠하고 있을 때 그녀의 오빠가 왔다. 내 남편이다. 그도 특이한 종족의 일원이다.    

  

 남매는 의기투합하여 일을 하기 시작했다. 멋짐 투성이의 페인트칠을. 그것도 비 오는 날에. 방을 제외한 모든 벽들이 두 번씩 칠해지는 장관이 펼쳐졌다. 어제 열심히 일한 나는 가만히 뒤에 앉아서 지적만 하라고 했다. 그냥 봐서는 내가 감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이 일 하는데 방해가 돼서 그런 것 같다.   

   

 동생은 몇 달 전 어깨 수술한 오빠를 걱정해서 혼자 롤러를 쓰겠다고 했고, 오빠는 자기도 롤러로 칠하고 싶다고 했다. 어이없는 그 광경을 보던 내가 시누이에게 말했다.

오빠한테도 롤러 주라고~ 그냥 둘 다 하나씩 갖고 칠하라고~

뒤에 앉은, 그들과는 다른 종족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까 투톱으로 드림팀이 활동한 시간은요~

세 번째의 새 페인트가 도착한 오후 5시쯤 본격적으로 작업이 시작되었다. 밤 10시가 되었을 때 거실, 복도, 부엌, 자투리 공간의 모든 실크벽지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 자리는 온통 연회색 페인트로 단장한 벽이 위용을 드러냈다.

대단하다.

그들은 초보였으나 프로였다.

그들은 페인트를 흘리지도, 묻히지도, 번지게도 않고 칠했다. 신속하고 깔끔히. 참 특이한 종족과의 재미있는 오후를 보냈다. 덕분에 나는 스토리가 있는 특별한 벽을, 아니 벽들을 갖게 되었다.    

  

 그들의 열정 덕분에 무사히 이사를 했다.

포장이사를 했더라도 정리가 필요하다. 동선과 활용성을 고려한 적절한 배치가 필요하다. 나만의 방식으로. 이사 후 보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정리 중이다. 특이한 종족의 남매는 내게 적당히 하라고 한다. 남들이 보면 나도 특이하게 보인다고 했다. 나는 본의 아니지만 그들과 같은 조직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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