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맛을 알기 시작하면 대부분 자신의 입맛에 맞는 커피를 찾게 된다. 가파른 원두 소매시장의 증가세를 보면 알 수 있다. 생두를 직접 사서 로스팅(배전)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로스팅까지는 못해도 볶은 원두를 사서 그라인더에 갈아 커피를 내려 마시는 수고로움 정도는 기꺼이 감내한다. 이미 갈아져 나온 원두는 편리하긴 해도 산패가 빨라 보존기간이 많이 짧다.
우리 모자(母子)는 앞에다 커피 추출 기구를 잔뜩 늘여놓았다. 아들이 장만한 지 좀 되었다는 기구들이지만 사용감은 거의 없어 보인다. 두 사람 중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않는다. 한참 망설임 끝에 먼저 엄마가 물을 끓이겠다고 말한다. 까다로운 과정 중 그나마 가장 쉬워 보여서다. 물 온도 맞추는 일도 만만하지 않은데. 아하! 앞에 놓인 것은 온도계가 달린 드립용 전기포트네. 물이 끓고 온도가 대략 80°C정도가 될 때까지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한편 눈치게임에서 밀린 아들은 커피콩을 그라인더에 담는다. 뚜껑이 없는 수동식 그라인더다. 손잡이를 잡고 돌리기 시작한다. 천천히 돌린다. 계속 돌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엄마는 편하게 전기 그라인더를 사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본다. 비싸지도 않던데. 그러자 아들은 손사래를 친다. 그 바람에 콩알 몇 개가 밖으로 튀어나간다. 주워 넣고 다시 돌린다.
아들은 엄마를 향해 조용히 말한다. 이것은 단순히 커피를 가는 동작이 아니라고. 커피를 갈면서 향을 맡으라고 했다.(뚜껑이 없는 수동식 그라인더라 향은 넘치게 많이 났다). 그러면서 커피의 분쇄 정도를 중간중간 확인해야 한다고. 커피 종류나 로스팅 정도에 따라 입자를 달리해야 한다고. 게다가 커피를 갈면서 하루를 반추해보는 여유도 즐기라고 했다. 이 경지에 이르면... 그렇다면 아들은 얼추 도인이다.
서예의 맛을 알게 되면 먹빛의 변화를 느끼고 싶어 한다. 번거롭더라도 먹을 갈아서 농도가 만들어내는 미학을 즐기고 싶어 진다. 화선지에 글을 쓸 때 선이 매끈하게 나오는 것보다 조금은 번지는 멋 부림이 있다. 기계적이지 않은 맛이다. 번짐이 너무 지나치지 않다면 써 놓은 글도 왠지 좀 프로 같아 보인다.
먹을 갈 때 규칙들이 있다. 은근히 좀 까다롭다. 벼루 앞에 단정히 앉아 먹을 간다. 먹은 무리하게 힘을 줘서 잡지 않는다. 손과 팔에 힘을 빼고 원을 그리며 먹을 간다. 먹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생기지 않게 주의하면서. 천천히. 연당(먹을 가는 부분)에 물은 몇 방울 떨어뜨린다. 어느 정도 농도가 생기면 연지에 그 몇 방울의 먹물을 밀어서 담는다. 너무 소량이라 담겼는지 잘 모를 수 있다. 다시 연당에 물을 몇 방울 떨어뜨린다. 다시 천천히 간다. 계속 간다. 이렇게 한참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연지에 먹물이 모인다.
먹을 가는 방법이 까다로운 것은 벼루의 연당 때문이다. 돌로 만든 벼루도 닳는다. 벼루의 수명은 연당의 수명이다. 숫돌의 사촌쯤 된다는 벼루는 연당을 조심히 만져보면 표면이 매끄럽지 않다. 이 부분을 특히 봉망이라 한다. 봉망에는 먹과의 마찰력을 위해 미세한 요철이 있다. 마찰력의 크기는 접촉면이 거칠수록 커진다. 요철이 크면 먹은 빨리 갈아지는데 먹물 입자도 크게 된다. 입자가 크면 좋은 벼루가 아니다. 먹도 중요하지만 좋은 벼루는 봉망이 미세하여 입자 고운 먹물을 만든다. 먹을 빨리 갈려고 힘을 주면 봉망이 상한다. 봉망의 날을 새로 세워 쓰기도 한다. 아무나 수리를 하면 벼루를 망친다. 그래서 천천히 간다. 좋은 벼루를 오래 사용하려면 평소 있던 힘은 빼야 하고 없던 정신력은 모조리 모아야 한다. 먹을 갈면서 향을 맡는다. 먹향은 매력적이다.
향을 맡으며 오늘 쓸 글을 생각해본다. 각 글자의 점획에서 출발해서 글 전체의 아름다움을 보는 포백도 생각해본다. 그리고 일상도 정리해 본다. 천천히 먹을 갈아야 하니 급하지 않다. 시간은 충분하다. 이쯤이면 도의 경지다.
그러나 서예 초보인 나는 이런 경지는 꿈도 꾸지 않는다. 초보는 먹이 번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선이 번지면 글은 지저분해 보인다. 매끄럽게 선이 나와야 그나마 깨끗하게 보여 잘 쓴 것처럼 보인다. 초보인 나는 먹을 갈지 않는다. 한 번 시도는 해봤지만 갈다가 말았다. 귀찮고 힘들어서 먹을 갈지 않는다. 초보를 위해 준비된 것이 있다. 이미 갈아져서 나오는 액체 먹이 있다. 내게는 딱이다.
아들은 커피를 갈다가 힘든지 땀을 닦는다. 돌리던 팔을 허공에 뻗어 근육을 풀기도 한다. 속도가 처음과 다르게 좀 빨라졌다. 그래서 그라인더에서 튕겨져 나오는 커피 콩알의 수도 좀 많다. 콩을 주워 담다가 그라인더를 손으로 덮어보기도 한다. 그러다 엄마에게 조용히 묻는다.
“엄마, 아까 그 전동 그라인더 얼마라고 하셨어요?”
도의 경지는 꿈도 꾸지 않는 엄마와 조금 도를 닦아보려던 아들은 함께 하산하셨다.
그리고 물이 대략 80°C가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물을 부었다. 기다리다가 성질 버릴까 봐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