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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령 Dec 16. 2020

내 안에 있는 대장님의 에피소드 열전

매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친구는 동일인으로 필자와 35년 지기입니다. 현재 열전은 코로나로 인하여 당분간 이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1. 나는 조경기능사다.

 친구한테 나무 보러 서울대공원에 가자고 했다. 조경기능사 시험에서 당당히 합격하여 기고만장할 때였다. 법학을 전공한 내가 조경 이론시험을 가뿐하게 넘어 실기의 난코스인 설계도까지 척척 그려냈다. 오로지 독학으로. 나의 넘치는 홍보로 내 주위에는 이미 다 아는 뉴스다.  

 친구가 정말 가고 싶은지 실눈을 뜨고 물었다. 내 체격은 어디서 협박당할 사이즈가 아니다. 꼭 가고 싶다고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재차 말했다. 친구는 내게 이미 한 해 전 꽃 축제가 열리는 서울대공원에 가자고 했었단다. 내가 가재 눈을 하고서 애도 아니고 뭐 하러 대공원에 가냐고, 나는 꽃도 싫고 나무는 더 싫다고 했단다. 듣고 보니 그랬던 것 같다. 그랬던 나를 데리고 친구는 대공원에 함께 가주었다. 친구는 먹을 것도 잔뜩 준비해서 왔다. 미운 놈에게 주는 떡인가 싶어 눈치껏 맛있게 먹었다. 배불리 먹고 움직이는 이 수목의 백과사전과의 동행을 후회 않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어째 이런 일이. 잘난 척 대장은 입도 벙긋 못했다. 나무에 반드시 있어야 할 나무명이 적혀있지 않았다. 인쇄물로만 나무 공부를 했던 나는 나무를 보고도 무슨 나무라고 부르지 못했다. 홍길동처럼 동서남북으로 왔다 갔다 하며 이름표 붙은 나무를 찾아다녀보았지만 허사였다. 혹시 친구가 나무이름이라도 물어볼까 봐 빈틈없이 신속한 조치가 필요했다. 다시는 여기 오지 말자며 친구에게 생떼를 부렸다. 내 친구의 주름살이 더 늘어난 것을 안다. 그녀에게 나는 얼추 웬수다.


2. 나는 수학 영재였다.

 혼자 원룸에 사는 아들의 이불 여러 장을 모조리 챙겨 담고 친구에게 빨래방에 같이 가자고 했다. 세탁 시간도 길고 중간에 건조기에 옮기는 과정이 있어 집에 왔다 갔다 하기에 어중간하다. 멀리서 기꺼이 와주는 친구가 신경 쓰지 않게 빨래방의 세탁기에 넣을 동전을 미리 준비해서 쌓아놓았다. 주객이 바뀐 것 같지만 이런 일은 늘 세심한 친구가 담당했다. 카드만 쓰는 세상에 동전 준비가 만만치 않았지만 나는 열심히 준비했다. 평소 좌충우돌 덤벙대는 이미지와 다른 뿌듯함으로 친구를 기다렸다. 그녀가 도착해서 늘어놓은 나의 잘난 준비물을 쓱 보더니 동전이 모자랄 것 같다고 했다. 뭔 소리냐며 동전 모으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아냐고, 우리는 이불을 사러가는 것이 아니라고, 모자라기는커녕 철철 남을 거라고 목청 대장이 조목조목 짚어가며 큰 소리로 말했다. 500원짜리 동전 12개를 자신 있게 가리키며 12000원이면 충분하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친구는 동전을 물끄러미 보면서, 그러니까 부족할 거라고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빨래방에는 동전교환기가 있을 텐데 뭐 하러 바꿔놨냐고도 했다. 나는 수학은 잘하는데 산수를 못한다. 그래서 남들 눈에 잘 보이는 것이 내 눈에만 잘 안 보이는 것이 분명히 있다고 확신한다.   

   

3. 베스트 드라이버의 최후

 내 차를 타기 싫어하는 친구를 감언이설로 설득해 친구의 집과 가까운 쇼핑몰에 15분쯤 걸려 도착했다. 쇼핑을 끝내고 주차한 곳을 찾지 못해서 그 넓은 주차장을 위아래 층으로 한참 찾아 돌아다녔다. 더워 죽을 뻔했다. 늘 있는 일이라 침착하려 했지만 친구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별로 동요 없었다. 나는 처음 와 본 곳이라 그렇다고 말했다. 힘들게 차를 찾아 탔지만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친구 집에 돌아올 때는 1시간이 넘게 걸려서 겨우 도착했다. 나는 운전하면서 내비를 잘 못 본다. 친구는 운전할 줄 몰라서 내비를 볼 줄 모른다. 더구나 갈래 길에서 몇 시 방향으로 가라는 멘트가 나오면 나는 내 직감만으로 갈 길을 정한다. 톨게이트를 두 번 들어갔다 나왔다 하고, 같은 길을 1시간 가까이 뱅뱅 돌고 있으니 이상한 낌새를 감지한 친구가 제발 다른 길로도 가보자고 말했다. 슬쩍 보니 이미 얼굴에 핏기는 싹 가셨으나 목소리는 최대한 차분히 말했다. 우기기 대장님이 똥고집을 내려놓고 나서야 겨우 그 미로 같은 길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렇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걱정하는 친구를 안심시켜놓고 신촌으로 향했다. 오는 길에 내 의사와 무관하게 들렀던 무수한 길들은 언급할 수 없다. 어디로 다녔는지 도통 모르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우리는 항상 편리한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죽어라고 걸어 다닌다. 다 내 탓이다. 내 친구는 다리도 아픈데도 혹시 내가 차를 갖고 올까 봐 참고 걷자고 한다.   

   

4. 공자 앞에서 읊은 문자의 향연

 늘 초보지만 서예 공부를 하면서 실력이 늘지 않으니 식견이라도 넓히려 기회가 될 때마다 전시회를 찾았다. 그때마다 친구는 기꺼이 동행했다. 잘난 척 대장님은 친구와 지식을 공유할 책임이 있다고 믿었다. 지식에 대한 도덕적 기준은 확실해서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지 않는다. 서예를 보러 갔으나 글씨의 세계는 잘 모르니 패스했다. 그래서 주로 안면 있는 한자만 공략해서 모르는 것은 피하고 요리조리 아는 것만 설명했다. 친구는 호응이 좋다. 늘 내 말에 경청해 주었다. 내가 잘난 척해도 참는다. 어려운 설명도 척척 알아듣는 훌륭한 학생이... 아니다. 그게 아니다. 맞다! 그녀는 중문학과를 나왔다. 그러니 그녀에게는 말도 안 되게 쉬운 상식이었다. 그런데 친구가 영어 강사라 나는 그녀의 전공을 자주 잊어버린다. 결코 내 탓이 아니다. 나와 취향, 식성, 성격 등 엄청 공통점이 많은 친구 어머니도 가끔 그녀의 전공이 헷갈린다고 하셨다. 친구는 내게 어머니와 유전자 검사를 해보라고 했다. 모녀가 바뀐 것 같다고. 그렇다면 이 문제는 내가 풀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공을 어머니께 넘겨야겠다.      


5. 나는 커피 맛에 예민하지 않다.

 원두커피는 아무리 해도 친해지지 않는다. 일단 귀찮음 대장으로서 할 짓이 못된다. 나는 인스턴트커피가 좋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커피는 빨간 봉지에 들어있는 오리지널 초**이다. 쌍벽을 이루는 빨간 봉지 오리지널 맥*과는 미묘한 맛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이 커피만 마신다고 했다. 친구는 유리병에 든 초**커피를 본 적은 있지만 봉지에 들어있는 그 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다고 했다. 문화적인 충격으로 기가 찼다. 아들한테 올 때 그 커피를 한 봉지 가져왔었다. 웬만해서 움직이지 않는 내가 빛의 속도로 일어나 원두커피 내리고 있는 그녀를 향해 그 빨간 봉지를 멋지게 던졌다. 나의 소중한 빨간 봉지 오리지널 초**커피를. 멋있게 집에 가져가서 마셔보라고 했다. 마실 때마다 이 커피를 추천해준 고마운 내가 생각날 거라고 했다. 그녀가 말없이 커피봉지를 자세히 보고만 있다. 생뚱맞기 대장의 눈에 이 장면이 좀 거슬린다. 왜? 그러자 그녀가 이건... 맥*인데? 뭐라는 건지. 어이가 없네. 자세히 다시 읽어 보라고 했다. 그녀가 내미는 커피봉지에 M자가 내 눈에 콕 박힌다. 그녀는 영어강사다. 길에서 외국인을 만나면 덩치 큰 나는 키 작은 친구 뒤로 가고 그녀는 유창하게 말한다. 원서도 줄줄 읽는다. 이제 알았다. 나는 빨간 봉지에 든 커피면 대충 초**커피라고 샀던 모양이다. 미묘한 맛의 차이는 어떻게 설명할래? 플라세보 효과라고 하면 될까?

    

5. 시간여행

 친구와 길상사를 다녀왔다. 무척 많이 걸어 정말 힘들었다. 나는 태생적으로 운동과는 시공이 다른 삶을 지향한다. 집으로 오는 지하철을 탔다. 내가 먼저 신촌역에서 내리고 친구는 몇 정거장을 더 간다. 혼자 타면 꽤 먼 거리지만 친구와 얘기하면서 오니 지루할 틈이 없었다. 내가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며 얘기를 하고 있는데 친구가 갑자기 신촌이라며 내려야 한다고 했다. 나는 미동도 않고 친구에게 말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이렇게 빨리 신촌역에 도착했을 리가 없다고 했다. 침착하게. 친구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밖을 좀 보라고 했다. 이미 닫히는 지하철 출입문 너머 신촌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맞네. 신촌이네. 그리고 지하철 문이 닫혔다. 친구는 보통은 이런 다급한 말을 들으면 일어나 보기라도 하는데 어쩌면 그렇게 꼼짝을 안 하냐고 물었다. 나의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은 귀찮음에서 온다고 대답했다. 엄청나게 웃긴 상황이 아닌데도 정말 둘이 숨도 못 쉴 만큼 웃었다. 웃다가 홍대에서 내렸다. 내려서도 혼자서 주위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한참을 웃었다. 빨리 태세 전환을 하고 싶었지만 실실 웃음이 삐져나왔다. 내 친구도 둘이 배를 잡고 웃다가 혼자 남게 된 지하철 안에서 웃음을 참느라 고군분투했다고 한다. 방금 떠나간 지하철의 선로를 보며 마치 스무 살의 우리로 시간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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