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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령 Sep 30. 2020

건망증, 그가 돌아왔다.

 늦은 밤, 느긋한 목소리로 아들이 전화를 했다. 

 “엄마, 인감도장을 잃어버렸는데... 새로 만들면 될까요?”

 나는 숨도 쉬지 않고 바로 말했다.

 “또?”

 아들 디스 하는 엄마가 있다. 나다. 한두 번이 아니다.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렸단다. 버스를 타고 오는데 정류장에 남아있던 친구가 전화를 했단다. 정류장에 노트북 놔두고 갔다고. 

또 다른 어느 날에는 버스에서 내려 집에 오는데 버스에 남아있던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네. 버스 안에 네 가방 있다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 기숙사 입주 전 한 달 동안 아들은 친정 언니 집에 있었다. 빛의 속도를 요하는 수강신청기간이 되었단다. 보통 속도전의 전장(戰場)은 PC방이다. 이른 아침, 언니 집 근처에는 마땅한 PC방이 없어 지하철을 타고 갔단다. 수강신청을 마치고 돌아와서 문을 열자마자 우리 언니가 물어봤단다. 가방은? 

공항 편도 여럿 있다. 여권이 없더란다. 조금 전까지 확인했는데. 방금 다녀온 화장실도 가봤는데 없더란다. 별 소용없는 대책을 모색하느라 왔다 갔다 하면서 저 멀리 화장실 가기 전 앉았던 근처를 바라보았단다. 그곳에 어떤 사람이 팔을 최대한 위로 뻗어 여권을 쥔 손을 계속 흔들고 있더란다. 여권 잃어버린 녀석이 보라고. 각설하고, 그랬던 녀석이 노트북이 든 가방을 늘 가지고 학교에 잘 다니는 것을 보고 숱하게 많은 소소한 사례들은 점차 잊혀갔다.  

     

 전화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동안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던 바로 그 녀석이다. 최대한 성질을 자제(自制)하고 남편의 자제(子弟)분께 새 도장을 만들어서 동사무소로 가라고 했다. 남편이 있던 서재에서 통화했기 때문에 그도 함께 듣고 있었다. 통화가 끝나자 남편이 아들 건망증에 대해 말을 했다. 살짝 짜증을 섞어서. 그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것이다. 역린을 건드렸다. 

     

 가끔 뉴스를 장식하는, 세상 모든 엄마를 무장(武裝) 상태로 즉시 돌입하게 하는 상황은 자식을 건드리는 때다. 무조건 반사다. 선전포고와 같다.(당연히 나는 아이를 혼내지만) 상대를 막론하고 바로 전투태세를 갖춘다. 

남편을 향해, 그대 만만치 않으며 사돈 남 말하면 안 된다고 척후병도 없이 바로 전투를 시작했다. 그리고는 아들만큼 다양한 그의 사례를 실어 속사포를 빠르고도 정확하게 날렸다. 맛보기용으로 열 개 정도. 팩트 폭격의 선제적 기습공격의 결과, 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마무리도 확실히 했다. 서재를 나오면서 전광석화와 같이 불을 확 꺼버렸다. 

퍼펙트 게임 오버!
이제 그는 홀로 어둠 속에서 패전의 쓴맛을 보리라.


 승전에도 동요하지 않고 방에 와서 가만히 생각과 함께 앉았다. 복기(復棋)하는 시간을 가졌다. 멘델의 유전법칙 중 우열의 법칙에 생각이 닿았다. 빈틈없이 완벽한 건망증을 소유한 아들을 봐서는 양쪽이 모두 우성이라는 건대... 남편 쪽은 이미 서재에서 사정없이 밝혀놨고, 우리 친정 쪽 라인업을 구축해보았다. 멤버들의 면면이 장난 아님을 인정! 특히 앞에 잠시 등장했던 우리 언니가 갑인데. 손에 있는 물건은 반드시 밖에 두고 들어오는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했었다. 

나는 패스. 자기 디스를 피하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다. 심각성의 경중을 따져 순서를 정할 수 없을 만큼 버라이어티 한 사건들이 지면에 차고 넘치게 많기 때문인데... 아뿔싸!!! 갑자기 할 일이 생겼다. 


잠시 망설이다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어둠 속에 앉아있을 서재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불을 켰다. 남편을 보았다. 얼핏 그도 날 보았던 것 같다.

 “옵빠? 혹띠 요기 내 폰 있떠?”

그의 손에 들려져 흔들거리는 내 폰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와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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