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정인(19)

부마가 되다

by 최재효

















부마(駙馬)가 되다





세희공주 일행은 한 시진 쯤 길을 걸었다 산을 넘고 개천을 건너 이름 모를 마을을 지났다. 다시 산길을 걷고 들판 길을 걸었다. 농부들이 논에서 못자리를 만들려고 하는지 논 한쪽 귀퉁이를 네모 반듯하게 다듬으며 바닥을 고르고 있었다. 공주 일행은 다시 야트막한 산길로 접어 들었다. 청년은 지리도 잘 모르지만 주지 스님이 일러준 대로 무작정 동쪽 방향으로 공주와 유모를 안내했다.



일행은 길고 좁은 산길을 나와 산 중턱에 자리한 작은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 초입에 아담한 정자가 보였다. 촌로들이 쉬기 위해 만들어진 듯보였다. 청년은 마을의 전경을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옥천에서 한번 당한 뒤라 사람들을 만나는 게 두려웠다.



“서방님, 저기 저 정자에서 잠시 쉬면서 서찰을 읽어보세요. 저도 그 서찰에 도대체 무슨 내용이 씌어져 있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그렇게 하지요.”



서찰의 주인이 먼저 읽어봐야 할 것을 이미 다른 사람이 읽어 버렸으니 천기가 누설 된 것이나 같았다. 청년이 정자에 앉아 서찰이 든 봉투를 열었다. 봉투 안에 두 통의 서찰이 들어 있었다. 청년이 두 장을 살펴보다가 한 장을 집어 들고 읽어 내려갔다. 공주와 유모도 곁에 서서 그 서찰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무척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사위보세요.

나는 조선의 국모(國母)입니다. 장모로서 혼례식에 찾가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동학사 주지 스님으로 부터 두 사람이 숙연(宿緣)이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희는 조선국 공주의 신분에서 상감의 노여움을 산 일로 여염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사위께서 우리 가문과 어떠한 인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지나간 일은 잊으시고 한 여인을 은애하고 평생 서로 의지가지하면서 평안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두 사람의 신분을 속세의 사람들에게 밝히지 마세요. 상감의 자비가 있기 전까지 두 사람이 세상에 알려지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두 사람의 행복이 한 순간 물거품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세요. 세상에 믿을 것은 오로지 자신과 살을 섞고 사는 지어미 뿐이라는 것을 명심해 주셨으면 합니다. 서로 다른 가문에서 자란 두 사람이 부부가 되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먼 훗날 상감의 마음이 누그러지면 두 사람을 부를 예정입니다. 이 서찰을 세희와 함께 읽어보시고 다 보시면 불태워 없애버리셔야 합니다. 부디 두 사람 몸 건강하고 오래오래 좋은 연으로 맺어지시길 바랍니다.


- 정희왕후 윤씨 -






청년이 서찰 한 통을 다 읽고 갑자기 얼굴이 사색이 되면서 몸을 떨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나머지 서찰도 읽기 시작했다. 청년의 상태가 이상하게 변하자 세희공주와 유모는 불안했다.




세희 보아라.

주지 스님으로부터 네가 김가 성을 가진 청년과 천생연분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단다. 하늘이 네게 연결해준 귀한 분으로 알고 신명을 다바쳐 평생을 화합하도록 해라. 어미는 네가 어디로 가서 살던지 건강하고 평안하게 살았으면 한다.


주지 스님에게 너의 혼사에 관한 모든 것을 위임했다. 주지 스님이 날짜를 잡아주면 그분의 지시에 따르도록 하여라. 혼인이란 두 집안이 인연을 맺는 중대한 일이지만 지금의 상황이 너에게 큰 기쁨을 주지 못하는구나. 어미로서 딸의 혼사를 직접 챙겨주지 못한 내 죄를 두고두고 부처님 전에 속죄할 것이다.


주지 스님은 너희가 부부의 연을 맺고 동쪽에 터전을 잡고 살아야 기(氣)가 성하고 오래오래 복락을 누릴 수 있다고 하셨다. 초야를 치루면 즉시 동쪽으로 멀리 이동하여 너희 두 사람이 편하다고 생각하는 장소가 나오면 그곳에 터를 잡고 살도록 하여라. 동봉한 호패는 너희가 평생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금은보화는

터를 잡고 가문을 일으키는데 용용하게 쓰기 바란다. 그리고 아버지 생각은 아예 잊었으면 좋겠구나. 먼 훗날 호시절이 오면 네가 보고 싶어 찾아 갈지도 모르겠구나. 지아비를 잘 보필하여 편히 살도록 하여라.


- 한양에서 어미가 딸에게 -





두 통 모두 정희왕후 중전 윤씨의 수결(手決)이 찍힌 서찰이었다. 청년은 서찰을 읽는 동안 정신이 몽롱하고 자신이 지금 어떤 거대한 음모의 늪에 서서히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서찰을 다 읽은 청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세희공주에게 절을 하려고 하였다.



“공주마마, 소인, 그동안의 불경을 용서하소서.”


“서방님, 아니 되옵니다. 아니 되옵니다. 어서 앉으세요.”



“공주마마, 소인의 죄를 용서하세요.”


“서방님, 아니 되옵니다.”



세희공주가 얼른 두통의 서찰을 집어들었다. 순식간에 서찰을 다 읽은 세희공주도 놀라고 있었다. 부부는 그 서찰이 동학사 주지 스님이 자신들에게 적담을 적어 준 서찰로 생각하고 있었다. 서찰 한 장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하고 말았다.



청년은 처음 세희공주를 볼 때부터 보통 신분이 아닐 것이란 추측은 했지만 조선의 공주일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조선 공주라면 상감의 여식이고 자신의 조부와 아버지를 척살한 원수의 딸이었다. 청년은 몸이 부르르 떨리면서 이것이 현실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러나 자신과 혼인한 여인이기 이전에 조선의 공주 신분이기에 예의를 갖추어야 했다.



청년이 어렸을 때 할아버지 손을 잡고 경복궁에 자주 놀러간 적이 있었다. 궁궐에 놀러갈 때마다 소년은 또래의 왕자나 공주들과 스스럼없이 뛰어 놀곤 했었다. 소년의 할아버지는 조선 최고의 실력자로서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막강해서 감히 수양대군이나 안평대군 등 세종의 아들들도 감히 대적할 수 없었다. 그때 소년은 친하게 지내던 공주를 보고 먼 훗날 그녀에게 장가들겠다고 다짐한 적도 있었다.



‘아아, 무서운 일이로다. 나의 어린 시절 꿈이 이루어지긴 했으나 하필이면 원수의 딸이란 말인가? 양가 부모의 인정도 받지 못한 혼인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의 어린 시절 집념이 이렇게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이루어지다니, 정말로 무섭고도 기이한 일이로다.’



소년이 대궐에 놀러가 공주들과 격의 없이 어울릴 때 공주와 옹주들은 서로 소년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암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때 세희공주는 대궐 밖 수양대군의 잠저(潛邸)에 있을 당시여서 소년과 만날 일이 없었다. 소년이 훗날 공주들과 혼인하겠다는 다짐은 이루어 졌다. 하지만 부마(駙馬)로서 남들이 부러워 하는, 행복하고 앞날이 보장되는 자리가 아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잠행을 해야 하는 딱한 처지였다.



‘이럴 수가! 철천지원수의 딸과 부부의 연을 맺다니. 먼 훗날 저승에 들면 조상님들을 어떻게 뵐 수 있단 말인가?’

청년은 청년대로 세희공주는 공주대로 깊은 상념에 잠겼다.


‘그렇다면 갑작스러운 혼인이 모두 어마마마의 의도였단 말인가?’



두 사람은 말 없이 먼 하늘만 바라보았다. 청년은 철천지 원수의 딸과 혼인한 사실에 부끄러워하면서도 주지 스님 말대로 삼세의 숙연인 공주와의 기묘한 인연에 치를 떨었다. 그는 머릿 속이 텅 빈듯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앉아서 하늘만 응시할 뿐이었다. 어느새 청년의 두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며 뺨을 적셨다.



‘도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 꼬였단 말이더냐? 원수의 딸과 몸을 섞고 어떻게 조상님들을 뵐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일은 벌어졌다. 나는 앞으로 어찌 행동해야 한단 말인가? 여기서 공주를 떼어놓고 나 혼자 산속으로 숨어들어야 하나?'



세희공주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청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청년의 손을 살며시 잡고 자신의 뺨에 대었다. 청년의 손에 묻은 물기가 공주의 뺨에도 전해졌다. 청년은 공주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려하지 않았다. 한동안 조용히 흐느끼는 청년을 안아주던 세희공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방님, 절 받으세요. 그동안 본의 아니게 서방님을 속였습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는 아바마마께 그간의 올바르지 못한 정사(政事)를 말씀드렸다가 아바마마의 분노를 사게 되었습니다.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을 때 어마마마의 도움으로 간신히 한양을 빠져나와 동학사에 몸을 숨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서방님을 만나 부부의 연까지 맺게 되었습니다.


이제 생각하니 모든 것이 주지 스님 말씀대로 서방님과의 숙연이 있어 부부가 된 듯합니다. 앞으로 저는 조선의 공주가 아닌 여염의 아낙으로 서방님을 하늘처럼 모시고 조용히 살겠습니다. 그간의 저의 언동을 용서하세요.”



“부인은 조선의 공주입니다. 소인이 어찌 공주마마의 절을 받을 수 있습니까?”


“서방님, 저는 조선의 공주가 아닙니다. 서방님의 여인입니다. 앞으로는 공주라는 말씀은 입에 담지마세요. 저는 서방님 한 분만을 의지하며 세상을 살아가려 합니다.”



청년은 자신의 할아비와 아버지가 상감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으나 끝내 참았다. 자신만 아픔을 간직하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착한 공주에게 까지 자신의 아픔을 강요한다는 일이 너무 잔인할 것 같았다.



‘죽는날까지 공주에게는 절대로 이야기 하지말자. 그렇게 하는 것이 서로를 위하여 좋을 것이야.’


“서방님, 이제 저에 관한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서방님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많사옵니다.”



“공주마마, 아니 부인, 그냥 예전처럼 소인을 대하듯 하세요. 소인은 한양에서 나고 자랐으며, 금강산 유점사에서 공부를 하기도 하였습니다만, 공부에 뜻이 없어 명산대천을 유람하고 있을 뿐입니다. 한때 잘 나가던 나의 집안은 이제 어디에도 없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가슴에 묻고 그냥 한 세월 금수강산을 유람하며 조용히 살고 싶었습니다. 소인을 지아비로 대하고 싶다면 아무 것도 묻지 마세요. 지아비와 지어미로서 서로의 등을 다독거리며 살면 그만 입니다. 공주께서 나와 살다가 실증이 나면 한양으로 가셔도 좋습니다. 기꺼이 보내 드리겠습니다.”



“서방님. 저는 공주가 아닙니다. 단지 여염의 아낙일 뿐이며, 오로지 서방님 한 분을 믿고 따르는 여인일 뿐이옵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서방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세희공주가 흐느끼면서 자신의 뜻을 토해내자 청년의 불편했던 심사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아버지의 겁박을 피해 멀리 도망온 공주가 이제는 측은하기 까지 했다.



“고맙소. 죽음이 갈라놓는 그 순간 까지 부인을 은애하리다.”


“서방님…….”



서신 한 장에 그간의 오리무중 같던 두 사람 사이의 답답함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지만, 천근 바위가 계속해서청년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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