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정인(최종)

부귀영화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by 최재효

















부귀영화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부인, 나는, 나는 이곳에 남겠소. 도저히 상감을 따라 한양으로 갈 수 없습니다.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가시구려. 내가 상감을 따라가면 상감 뿐만 아니라 중전마마와 부인까지 불편할 겁니다. 부인이 이승 사람이 아닌 줄 알던 사람들이 부인과 나 그리고 아이들이 한양에 나타나면 일대 혼란이 올겁니다. 결국은 상감의 그동안의 치적(治積)에 누가 될 게 분명해요.

김서방의 말에 세희공주는 눈앞이 캄캄했다.


“서방님,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가 저를 용서하셨습니다. 이제 지난 일은 모두 잊고 한양으로 가서 평안하게 사세요. 아이들만 없다면 저도 서방님의 뜻에 따르겠지만, 두 아이의 장래를 생각하면 한양으로 가야합니다. 여기 살면서 아이들을 농투성이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부인의 말에 김서방은 속으로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공주가 산골에 살면서 여러가지로 불편한 점이 있

을 테지만, 그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기에 김서방은 안심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난, 이곳이 좋습니다.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한양으로 가시구려.”


“…….”


세희공주는 지아비의 반응에 충격을 받았다. 자기 말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들어주는 지아비였다. 그녀는 지아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공주가 산골 생활에 염증이 생겨도 할 수 없이 산 것일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르자 김서방은 침통한 감정을 애써 삭히느라 무진 애를 써야했다.


“부인, 나는 한양으로 갈 수 없습니다. 나는 부귀영화도 필요없고 오직 부인만 내곁에 있으면 됩니다. 아이들이 아무 욕심없고 해맑게 자라면 됩니다. 부인이 그간의 마음이 바뀌었다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나의 초심은 변함이 없어요."



김서방의 하소연에 세희공주는 수년 전 한밤 중에 한양을 떠나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다시는 한양 땅을 밟지 않겠다고 각오했던 결기가 어디로 사라지고 안락함을 추구하려는 모습으로 변한 자신이 낯설기만 했다.



“서방님!”


“진정입니다. 나는 가고 싶지 않아요.”


“…….”



세희공주는 지아비의 뜻 밖의 반응에 깊은 상념에 빠졌다.



‘내가 지아비만 이곳에 남겨 두고 아이들과 아바마마를 따라 한양으로 돌아간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이미 나는 왕실 족보에서 삭제되었고, 왕실의 종친들은 나를 죽은 사람으로 알고 있을 텐데……. 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세상과 단절되 곳에서 죽은 듯 살아가는 게 어쩌면 나에게는 큰 복락일 지 모른다.


세희공주는 한숨을 내 쉬었다. 그녀의 장고(長考)에 김서방도 덩달아 자신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찌해야 하나. 내가 김종서 할아버님의 혈손이라는 것을 알면 상감은 나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야. 그리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나와 공주를 파혼하게 하겠지. 내가 공주와 부부가 되어 자식까지 낳고 살고 있으니 차마 죽이지는 않겠지. 하지만 찰거머리같은 상감의 측근들은 나를 역적의 자식이니 죽여야 한다고 상감을 압박할 것이야. 한양에 가면 안 된다. 나 하나 잘못되면 그만이지만 공주와 두 아이에게는 무슨 불행이란 말인가?’



지아비가 방바닥을 내립떠보며 돌부처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자, 세희공주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만 생각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었다. 여러 해를 함께 살아도 지아비의 속마음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그녀는 착잡한 심사를 가눌 길 없었다.


“서방님,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합니다. 서방님이 한양 길을 원치 않으시면 저도 가지 않겠습니다. 부부는 일심동체이니 함께 움직여야 하겠지요. 우리 집안의 대들보는 서방님이십니다. 그 대들보가 흔들리면 저와 아이들도 흔들리고 우리 가족에게 미래도 없는 겁니다."



세희공주의 담담하면서 지아비를 배려하는 발언에 그제야 김서방은 속으로 안도했다. 공주의 말대로 자식의 앞날을 생각한다면 한양으로 보내야 했다. 하지만 아들이 성년이 되어 과거를 보게 되면 증조부, 할아버지, 아버지의 이름과 외증조부, 외조부의 함자 그리고 그들이 벼슬했을 경우에는 그 직책까지 과거 시험지에 기입해야 한다. 김서방은 조선의 제도로는 자신과 아이들의 운명을 도저히 바꿀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아니오. 부인과 아이들만이라도 상감을 따라 한양으로 가세요.”


김서방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서방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공주의 얼굴에 일종의 결기와 강한 다짐이 엿보였다.



“고, 고맙소. 부인, 우리는 신분이 노출되어 이곳에서 더는 살 수 없습니다. 상감이 떠나면 경상도 영일(迎日) 지역으로 떠날까 합니다. 그곳에 먼 집안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서방님, 저와 두 아이들도 함께 데려가주세요.”


김서방은 세희공주가 말은 자신을 따라가겠다고 했지만, 한양으로 가고싶어 하는 꿈을 완전히 버린 게 아닌 것 같아 불안했다.


“부인은 아이들과 상감을 따라 한양으로 가세요. 한양에 가셔서 그동안 누리지 못한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세요. 나는 속세를 떠나 부인과 두 아이의 무탈을 빌며 살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 같습니다."



“서방님, 부부는 부창부수라고 들었습니다. 서방님이 안 가시는 데 제가 어찌 부모님을 따라 한양으로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제가 잠시 혼몽하여 본분을 잊은 듯합니다. 저는 조선의 공주도 싫고 부귀영화도 싫습니다. 오로지 서방님과 두 아이가 제 곁에 있으면 됩니다. 죽는 날까지 서방님과 함께 할 것입니다.“


김서방은 세희공주가 이제 본분을 되찾은 듯하여 안심이 되었다.


“부인, 고맙소.”



불안한 가운데 평화로운 날이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다. 산촌에 세희공주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인근 고을의 수령들이 앞 다투어 찾아와 그녀를 만나기 위해 난리법석을 떨었다. 산골 사람들은 갑자기 변한 주위 풍경에 마치 여우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들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며 김서방 집으로 모여들었다.



어떤 수령은 마차에 금은보화와 값비싼 재물들을 바리바리 싣고와 공주의 알현을 요청하였고, 또 어떤 지방 토호는 쌀 수백 가마니를 가지고 와서 세희공주에게 진상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공주가 만남을 거절하자 앞마당에 쌀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가버리기도 했다. 조용하던 산촌이 갑자기 몰려든 인파로 인하여 마치 장터를 방불케 했다.



아침부터 마을 청년들이 김서방 집안 일을 거들고 아낙들은 음식을 준비하여 공주 가족에게 바치는 등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마을 원로들은 김서방의 집 앞마당에 천막을 치고 몰려드는 지방수령들과 토호들을 맞았다.



그들이 타고 온 가마와 말들이 마을 한가운데 줄지어 늘어서 있어 그곳이 마시장(馬市場)같은 착각을 일으키기도 했다. 공주 부부에게 환심을 사서 벼슬 한 자리를 얻어보려는 경상도와 충청도의 약삭빠른 파락호들이

거의 출동하다시피 했다. 마을 공터에는 임시로 외부 방문객을 위한 임시 막사까지 설치되었고 음식과 술을 파는 장사치들도 모여들었다.



김서방 내외는 점점 늘어나는 방문객들로 인하여 큰 부담을 느꼈다. 내외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내칠 수도 없어 방문객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만약 상감이 이 사실을 알면 크게 호통을 칠 것 같았다.



“서방님, 내일이면 아바마마께서 피접을 마치시고 한양으로 돌아가시는 날입니다. 내일 오후 쯤 이곳에 도착할 것 같은데 어찌해야 하나요?”


“나도 그것이 고민입니다.”


오후 늦게 부부는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였다. 두 아이는 갑자기 집이 분주해지고 마을 사람과 외지인들이 몰려들지 신바람이 났다. 사람들은 두 아이에게 용돈을 주기도 하고 귀엽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도 했다.


“서방님, 속히 이곳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오늘 밤 안으로 이곳을 떠나지 못하면 저와 아이들은 아바마마를 따라 한양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이렇게 합시다.”



김서방이 운을 떼어놓고 혹시 누가 자신들의 은밀한 이야기를 들을까 걱정되어 방문을 열고 밖을 한번 살펴보았다. 다행히 부부의 방 앞을 어른 거리는 그림자가 없었다.



“부인, 오늘 밤 집 밖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병사들과 승정원관리에게 기름진 음식과 술로 위로해 줍시다. 그들에게 음식을 푸짐하게 들게 하고 독한 술을 먹여 잠들게 한 뒤 이 집을 빠져나가는 겁니다. 짐은 모두 두고 귀중품만 챙기면 됩니다.



“서방님, 기가 막힌 방법입니다.”


세희공주는 지아비의 계책에 혀를 내둘렀다.



“부인, 술과 음식 준비는 가능하겠지요?”



“가능하고말고요. 아까 점심에도 병사들에게 탁주 한 말을 내줬더니 금방 비웠어요. 병사들이 술을 좋아하니 독한 술 서너 독만 준비하면 집을 빠져 나가는 일은 성공할 수 있을 겁니다.”



세희공주가 동네 아낙네들에게 술과 기름진 음식을 준비하여 달라며 돈을 건네자 아낙들은 돈을 받지 않고 술과 음식을 준비하였다. 공주는 고을 수령들과 토호(土豪)들이 진상한 물건 중에 귀금속과 값나가는 물건을 챙겼다. 또한, 유모에게 넌지시 탈출 계획을 알리고 준비하라고 알렸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자 김서방은 승정원소속 관리를 방으로 불렀다.



“우리 가족들을 위하여 수고하시는 나리에게 저녁에 술을 대접하고자 합니다.”



“아이고! 부마님, 고맙습니다.”


착살맞게 생긴 관리가 비굴할 정도로 웃으며 김서방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고맙습니다. 밖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병사들에게도 그동안의 수고를 위무하는 뜻에서 공주가 술과 음식을 마련하겠다고 합니다.”



“부마님, 그리 하지 않으셔도 되는 걸요. 하루 세끼 공주마마께서 잘 챙겨 주셔서 잘 먹고 있답니다. 공주마마와 부마님은 참말로 좋은 분들이세요. 내일 상감마마게서 돌아오시면 두분의 마음 씀씀이를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두분 복 받으실 겁니다."


승정원 관리는 두손을 싹싹비벼가며 김서방에게 아당하였다.


“조선의 부마와 공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고맙습니다. 부마님, 고맙습니다.”



해가 지고 달이 중천 쯤에 오르자 공주는 승정원 관리를 안방으로 초대하고 유모를 시켜 병사들에게도 술 동이를 안겼다. 점심을 일찍 먹은 터라 관리와 병사들은 몹시 출출한 상태였다.



“어서 오세요.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공주가 일어나 관리를 맞자 관리는 그녀에게 넙죽 절을 올렸다.



“공주마마님을 뵙습니다.”


“어서 일어나세요."



“소신이 어찌 감히 공주마마 앞에서 술상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오늘 저녁은 내가 그대의 수고를 위무하는 것이니 그냥 편하게 앉으세요.”



“그래도 어찌 감히.”


“일어나세요. 공주께서 그대의 노고를 치하하는 자리니 개의치 마세요.”


곁에 있던 김서방이 공주를 거들고 나섰다.


“부마님, 고맙습니다.”



관리는 푸짐하게 차려진 상 위의 음식으로 자꾸 시선을 돌렸다. 공주가 얼른 주전자를 들어 손수 술을 따라주었다. 관리는 수십 년을 궁궐에서 근무하면서 왕실 인사에게 술을 받아 본적이 없었다. 술 잔을 든 관리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공주마마,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요?”



“우리 가족을 보살펴 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오늘 밤은 마음껏 드시고 편안하게 주무세요. 내일 오후 쯤 아바마마께서 이곳에 들리실 테니 시간도 넉넉합니다. 자리를 편하게 하세요.”



“황감하여이다. 공주마마.”


“자, 내 술도 한잔 받으시구려.”


김서방도 주전자를 들어 승정원 관리의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부마님, 이 은혜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나이다.”


“많이 드세요. 술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고, 고맙사옵니다요. 부마님.”



승정원 관리는 세희공주와 김서방이 따라주는 술을 연거푸 마시더니 그만 혀 꼬부라져 횡설수설했다.

김서방과 공주는 회심의 미소를 주고 받았다. 사내는 금방 술상 머리에 엎어져 코를 골기 시작했다.



“이 술은 공주마마와 부마님께서 하사하는 겁니다. 어차피 내일이면 한양으로 올라가실 테니 오늘 밤은 마음 푹 놓으시고 객고를 푸시구랴.”


유모가 특유의 말로 병사들을 안심시켰다.


“고맙습니다. 공주마마와 부마님의 하해 같은 은혜를 어찌 보답해야 할지요?”



“그런 소리말구 많이 드시구랴. 술과 안주는 얼마든지 있어유. 승정원 나리도 안채에서 부마님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있어유.”


“그래요? 그럼 오늘은 안심하고 마셔도 되겠네.”



그렇지 않아도 속이 허해 안채를 기웃거리던 병사들은 유모가 내온 술과 안주를 보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입이 벌어졌다. 그들은 쉴새 없이 술을 마시며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금방 술 동이가 비워졌다. 유모는 즉시 술동이를 더 가져왔다.



“역시, 사람은 줄을 잘서야 돼. 우리가 상감을 따라 갔으면 고생만 했을 거여.”


“자네 말이 맞아. 줄은 무조건 잘서야 돼. 사람 인생은 줄에 달렸다고. 순간의 선택이 한 평생을 좌우하지. ”


“이 사람들아, 나도 좀 줘. 자네들만 마시지 말고.”



집 주위에서 경계 근무를 보던 병사들은 사랑채에 들어 공주가 하사한 술과 고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퍼마시고 있었다. 술 동이가 거의 비워가자 병사들은 하나 둘 쓰러져 코를 골기 시작했다. 곧 모든 병사들이 대자로 누워 코를 골았다. 유모는 그 광경을 보고 공주에게 달려가 알렸다.



“부인, 어서 이곳을 뜹시다.”


“서방님, 밖에 누가 없겠지요?”



“방금 집 안팎을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병사들은 사랑채에서 여전히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어요. 저 사람도 저렇게 코를 골고 있고…….”



김서방이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승정원 관리를 가리켰다.



“서방님, 대문으로 나가다가 혹시 누가 볼지 모르니 뒷담을 넘어 가는 게 어때요?”


“그렇지 않아도 뒷담을 약간 헐어 놨습니다.”



부부와 유모는 방을 나서면서도 연신 집안을 두리번 거렸다. 행여나 마을 사람들이라도 들어올까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아무도 공주 일행을 보는 눈이 없었다. 김서방은 부러 집안 곳곳에 불을 환하게 밝혀 놓았다. 하늘에 구름이 끄느름해서 달도 보이지 않고 주변이 칠흙처럼 어두웠다. 멀리서 개 짓는 소리와 소쩍새 우는 소리만 바람을 타고 전해질 뿐이었다.


세희공주가 먼저 담을 넘고 다음에 유모와 김서방이 뒷담을 넘었다. 김서방과 유모의 등에는 남매가 세상 모르고 잠에 취해 있었고 공주의 손에는 귀중품을 담은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공주 일행은 두 시진 가량 무조건 동쪽을 향해 뛰다시피 했다. 일행이 삼십여 리 쯤 왔을 때 그때까지 구름 속에 있던 달이 슬며시 얼굴을 내밀었다. 산길 좌우로 핀 봄꽃이 달빛을 받아 더욱 활홀한 자태를 뽐냈다.



"서방님, 저 달 좀 보세요."


"달이 참 밝습니다."



"서방님과 인연을 맺던 날도 저 달님이 내려다보고 계셨지요. 저는 그때 그 모습을 평생 지울 수 없을 겁니다."


"저 달님이 죽매장이이며 증인입니다. 그날 밤 탑돌이 할 때도 저 달님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이런 일을 겪지 않을 테지요."



"나무 월광보살!"



공주와 김서방은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달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두 사람은 달에게 자신들의 미래를 굽어 살펴달라고 빌었다. 세 사람의 그림자가 산길에 길게 드리웠고 달은 서서히 서천으로 달려가면서 하얀 입김을 지상으로 뿜어냈다. 말 없이 밤길을 걷는 세 사람은 무언으로 지금의 심정을 주고 받았다. 세 사람은 다리가 아픈 것도 잊고 무작정 동쪽으로 향했다. 사방이 여명으로 물들 즈음 그들은 낯선 지역에 도착했지만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오후 상감과 정희왕후가 세희공주가 사는 마을에 도착했다. 그런데 공주 부부가 당연히 집 밖에 나와 자신들을 환영할 줄 알았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만 길에 나와서 상감의 행차를 맞고 있었다. 그때 승정원 관리가 휘청거리며 뛰어와 상감 앞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그의 낯빛은 무척 어두웠다.



“공주가 어째 보이지 않느냐? 공주가 어디 아픈게냐?”


“사, 상감마마. 소신을, 소신을 죽여주소서.”


“죽여 달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



상감이 승정원 관리를 쏘아보며 묻자 그는 벌벌 떨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뒤로 공주의 집을 지키던 군사들까지 고개를 조아렸다. 모두가 낯빛이 하얗게 뜬 상태였다. 상감은 그들의 낯선 행동에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네가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이냐?”


“사, 상감마마. 소신을 죽여주소서.”


승정원 관리의 이마가 땅에 닿아 있었다.


“답답하구나. 도대체 공주는 보이지 않고 너는 왜 자꾸만 죽여 달라고 하는 것이냐? 어서 소상히 아뢰거라.”



승정원 관리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밤의 일을 실토했다.



“뭣, 뭐라고? 공주와 부마가 야반도주하였다고?”



“도대체 왜? 왜 공주와 부마가 야반도주하였단 말이냐? 네놈들은 무엇을 하였기에 공주 부부가 집 떠나는 것을 모르고 있었더란 말이냐?”


기분 좋게 정희왕후와 피접을 다녀온 상감의 용안이 흐려지더니 노발대발했다. 그 사품에 정희왕후도 기가 막힌지 입이 벌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 소신을 죽여주소서. 상감마마.”


승정원 관리와 병사들은 사색이 되어 벌벌 떨면서 바지에 오줌까지 지렸다. 그들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듯했다.



“여봐라, 저 놈들을 당장에 효수(梟首)하거라.”


“상감, 상감! 안 됩니다.”


정희왕후가 상감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안 된다니요? 임무를 소홀히 한 놈들입니다.”


“또 살생을 하면 안 됩니다. 상감, 세희는 우리와 한양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 것 같습니다. 그냥 세희와 그애 가족들이 평안히 살도록 하세요. 그 아이가 우리와 오랜 세월 떨어져 살다보니 대궐에 가서 사는 것이 불편한가 봅니다. 지금까지 상감과 저는 세희를 죽은 것으로 여기고 살았으니, 다시 가슴에 묻고 사십시다.”



크흑-.


상감은 가슴을 치며 대성통곡하였다. 정희왕후가 상감을 위로했지만 그는 가슴을 쳐대며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중신들은 갑작스러운 상감의 통곡에 어쩔 줄 몰라했다.



“내가 지은 업보입니다. 이제 와서 그 애를 잘 대해 준들 내 업보가 사라지겠습니까? 중전 말대로 하리다."


"잘 생각하셨어요. 그래야 그애도 마음이 편할 겁니다."


"세희야, 세희야! 못난 아비를 용서해 다오. 네가 어찌 이 아비를 버리고 떠날 수 있단 말이냐?”



“상감, 그만 진정하세요. 그 아이의 운명이 그런 것을 어쩌겠어요. 그냥 그 아이가 편히 떠나도록 하세요.

상감과 제가 먼 훗날 저승에 들면 이승에서 못한 아비 어미노릇을 해야 겠지요."


"세희야, 내가 잘못했다. 이 아비가 잘못했어. 못난 아비를 용서해다오. 세희야!"



상감은 세희공주의 집에 들어 한나절 통곡하였다. 조정 중신들과 호위 군사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상감의 통곡소리가 잦아질 때 까지 꼼짝 않고 서있었다. 두 눈이 퉁퉁 부어오른 상감 내외는 서둘러 어가에 올랐다. 마을 사람들은 어가가 산모퉁이를 돌 때까지 말없이 서있었다. 산새들은 마을에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이리 저리 날아다녔고, 무심한 구름은 조용히 남녘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끝-









* 끝까지 읽어주신 님에게 고개 숙여 고마움을 전합니다. 본 작품의 최종 탈고시

비문, 오탈자, 띄어쓰기를 수정 보완하고 서술을 묘사로 전환할 예정입니다.

곧 다른 작품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저자 최재효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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