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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모(2)

아버지의 한(恨)

by 최재효


[역사 중편소설]










아버지의 한(恨)






그미가 서라벌 저잣거리를 걸어가면 허릅숭이나 반거들충이들 때문에 한바탕 난리를 쳐야 했다. 서라벌의 남녀노소가 그미를 보기 위하여 거리로 빽빽하게 모여들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미의 빼어난 자태에 놀라고 태자비라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여인들은 그미를 시샘했고 반지빠른 총각들은 휘파람을 불어대며 그미에게 추파를 던졌다.


계림국에서는 군주가 후사도 없이 갑자기 붕어할 경우나 혹은 후사가 있지만, 능력이 부족할 때에는 귀족 회의에서 군주의 친인척 중에서 적임자를 차기 군주로 선출하였다. 군주 계승 서열에서 뒤쪽에 있던 내해가 새로운 군주로 지명되자 서라벌은 한바탕 홍역을 치러야 했다.


죽은 태자 골정과 그미 사이에 조분과 첨해가 있었지만, 귀족 회의에서 그들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를 들어 이매의 아들 내해를 차기 군주로 추대한 것이다.



김씨 가문에서 역대 군주의 배우자와 태자비가 네 명이나 배출되는 것을 보고 자란 그미는 자신도 머지않아 계림국의 왕비가 되리라 다짐하였다. 그러나 그미의 꿈은 지아비 골정이 이승을 등지는 바람에 허사가 되었다.


김알지는 세한을 낳았고 세한은 아도(阿道)를 낳았으며 아도는 수류를 낳았다. 수류는 욱보를 낳았고,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았다. 구도는 슬하에 아들 미추(味鄒), 말구, 대서지와 딸 옥모를 보았다. 그미의 가문은 계림국의 왕비족이었다.


김구도는 아달라이사금 때 *파진찬에 임명되었고, 벌휴이사금 때는 좌군주가 되어 *소문국(召文國)을 정벌했다. 백제가 모산성을 침공하자 구도가 막아냈고, 이듬해 백제가 다시 침공해오자 구양에서 싸워 크게 승리했다. 하지만 벌휴이사금 7년 백제군에게 속아 와산 전투에서 패배하자 구도는 계급이 강등되어 부곡 성주로 좌천되는 비운을 맛봐야 했다.


* 파진찬 – 파진찬(波珍飡)은 계림국에서 관리로서는 네 번째로 높은 관등, 1등급은 각간(角干), 2등급

은 이찬(伊湌), 3등급은 잡찬(迊飡).

* 소문국 – 경상도 의성(義城) 지역에 존재했던 소국.



김알지가 박파사에게 군주의 자리를 이양하지 않았다면, 김씨 가문도 박 씨와 석 씨에 이어 계림국의 군주를 배출하는 귀족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알지가 자신의 지지 세력을 규합하여 박 씨 세력과 왕위 쟁탈전을 벌일 수 있었으나, 당시는 여러 면에서 박혁거세 후손들에게 밀리는 상태였다.


알지는 자칫 잘못하면 김 씨 일족이 박 씨들에게 몰살당할 수도 있는 위급한 상황에 몰리자 할 수 없이 태자 자리를 박 씨들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미는 아버지 김구도가 임종 때 남긴 유언을 되새겨 보았다.


‘아비가 석 씨와 박 씨 일족을 제압하고 계림국을 만세 반석 위에 올려놓으려고 했건만, 한 번의 실수로 나락으로 떨어져 이렇게 허무하게 죽음을 맞는구나. 너희들은 이 아비가 남긴 유언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그리고 아비의 유언을 반드시 성사시켜다오. 유언의 뜻은 너희들이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한평생 일신의 영달과 가문의 중흥을 위하여 동정서벌하던 김구도는 와산 전투에서 백제군에게 패하여 한직으로 쫓겨났다. 그는 와신상담하며 재기의 기회를 엿보았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 했다.


그의 두 눈에서는 피눈물이 쉴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임종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함께한 술례부인. 큰아들 미추, 둘째 아들 말구(末仇), 막내아들 대서지(大西知) 그리고 외동딸 옥모가 흐느끼고 있었다.

‘아버지, 제가 비록 여인이지만 아버지의 한을 꼭 풀어드리겠습니다.’


곁에 있던 남동생들은 여자의 몸으로 어찌 아버지의 한을 풀어 드릴 수 있는지 의아했다. 그미는 이미 태자 골정과 혼인하여 어린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시아버지 벌휴이사금은 김구도의 출중한 무공과 조정 내에서의 그의 지지기반이 탄탄하다는 것을 알고 늘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구도가 백제군에게 한번 패하자 벌휴이사금은 그것을 빌미로 중앙 정치판에서 그를 지방으로 쫓아버렸다.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벌휴이사금마저 붕어하자 그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그미는 천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절호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며칠 후 그미의 형제들이 모여 앞으로의 일을 상의했다.


“누이, 멀리 봅시다. 우리 사 남매가 합심하면 언젠가 아버지의 뜻을 받들 수도 있을 겁니다. 계림국의 군주는 조정 내 지지 세력과 잘 조련된 군사 이천 명만 가병(家兵)으로 가지고 있으면 될 수 있어요.”



그미의 바로 아래 남동생 미추가 자신 있는 태도로 말했다. 그 역시 어려서부터 대권에 뜻이 있던 터였다.


“큰형님, 손바닥만 한 서라벌에서 이천여 명의 병사를 어찌 양성한단 말입니까? 자칫 잘못하다가 반역죄에 엮여 처형될 수 있습니다.”

그미의 막내 남동생 대서지가 의문을 제기하였다.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누님, 일단은 내해가 군주가 되었으니 앞으로 얼마나 계림국을 잘 다스리나 두고 보면서 차차 계획을 세웁시다. 누님이 젊고 조분과 첨해 조카도 어리니 시간은 누님 편입니다. 당분간은 내해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내해를 안심시킨 다음에 후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당분간 납작 엎드려 죽은 척하고 살아야 합니다.”



성질 급한 그미의 둘째 남동생 말구가 앞으로 살아갈 방법을 제시했다. 말구와 대서지는 둘 다 무예에 뛰어나고 용맹스럽기로 소문난 청년 장사(壯士)였다. 둘은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돌아다니며 잔뼈가 굵었고 용병술도 익혀 장래가 촉망되었다.



그에 비해 미추는 무예에 특출한 재주는 없었지만, 키도 크고 외모가 근사한 헌헌장부였으며, 학문에 조예가 깊고 사리가 분명하였다. 그미는 남동생들을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든든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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