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는 씨 뿌리는 농부
중학교 때 도덕 선생님을 만나러 충북 제천에 갔다. 30년도 더 지난 인연이다. 담임선생님도 아니었고 특별한 사연이 있었던 사제지간도 아니었다. 그냥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교과시간에 들어오시는 선생님이셨다. 기억에 남는 이유는 당시 막 부임한 20대 남자선생님이어서인지, 강남의 사립중학교 분위기와 다소 이질적인, 당장에 가방에서 호미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순박한 외모여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생기와 장난기 넘치는 여중생들을 두고 어쩐지 유독 크게 느껴지는 교탁 앞에 선 샘은 두려워서인지 설레어서인지 손을 떨고 계셨다. 본인은 촌 출신이라 도시 공기가 안 좋아 머리가 아프다고 종종 말씀하셨다.
초임샘들이 그렇듯 열정이 많고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하셨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내가 오래도록 샘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니 전태일 이야기, 인종 문제, 부모가 일하러 나간 사이 아이들만 집에 있다가 화재로 숨진 사건 등 그런 보조자료를 나눠주셨다. 한 번 언급에도 놀라기도 하고 그런 일이 있구나 정도로 스쳐갔지만 나중에 두고두고 기억에 남기도 했다. 협동학습, 프로젝트 수업이라는 말도 몰랐던 시절 모둠별로 모아 환경 문제에 관해 뭔가를 조사하는 활동도 했었다. (우리 모둠 내에선 그 과정이 엉망진창이긴 했지만 어찌 됐던 그런 경험 자체로 의미 있었다고 본다.)
또 일주일에 한 번씩 주제를 주고 글을 써오라고도 하셨다. 주제는 대중없었는데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는 즐겁고 성실하게 썼다.
그리고 어젯밤 선생님 만나기 전 혹시 그 글쓰기 공책(일명 명상록)이 모아둔 일기장 근처에 있지나 않을까 찾아보았다. 아! 32년 된 공책이 있었다.
오늘 공책을 가지고 친구 손**과 준비한 소박한 술선물을 들고 샘을 만났다. 샘은 그 인상 그대로셨다. 오히려 한결 유쾌해 보이셨다.
샘의 패기와 의욕에 찬 10년의 교직생활과 대안학교에
이어 이주여성을 위한 활동과 지금의 농촌청년공동체 일까지 가성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신념을 향한 걸음걸음이었다. 사람이 모여하는 일들에 어디 잡음과 다툼, 불화가 없었을까마는 큰 방향과 지향점을 향해 웃으며 가보자고 깃발을 들고 뚜벅뚜벅 전진하는 느낌이었다.
일하는 자그마한 사무실, 지역에 손길 닿은 곳곳을 투어 하듯 보여주셨다. 자택에도 잠깐 들러 사모님도 만나 뵙고 내어주신 생강차와 알이 작지만 단 사과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승자독식, 경쟁, 자본이라는 단어가 거스를 수 없는 작동원리인 세상에서 선생님은 이렇게 살아도 의미 있고 즐겁고 또 공동체에 도움이 되게 살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지표 같았다. 나의 유물과도 같은 명상록 한 권을 놓고 한참을 이야기하며 과거의 낯선 나도 만나고 샘의 젊은 시절도 만나는 시간을 보냈다.
https://youtu.be/wH7 Qysht0 cg? si=rJCgiMe7 XQ4 D0 mj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