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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0월

주인잃은 삐삐 찾아주다 생긴 인연

by 던다


97년 나는 아직 고3이다.


그 해의 일 년은 2년 같았다. 무더위가 가시고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9월이었다. 선생님들은 항상 더위 꺾이고 정신 차리면 늦는다고 3월부터 엄포를 놓으셨다. 진짜 가을이 오니 그 수능이란 무시무시한 것이 가까이 왔구나 싶었다. 그 계절의 온도와 습도, 공기의 냄새와 함께 죄도 없이 조금 울적한 마음이 기억이 난다.


나는 집에서 꽤 거리가 있는 고등학교를 다녔다. 실제로는 3.5킬로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내가 살던 아파트는 교통이 안 좋아서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없었다. 집에서 학교를 가려면 10분 걸어가서 버스를 타고, 3 정거장 가 내린 다음 다시 15분을 걸어야 하는 식이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땐 버스 노선이 좋지 않아 동네 한 바퀴를 크게 돌아야 했다. 거의 유일하게

의존하는 버스였다. 기사 아저씨는 승객을 많이 태우지도 못하는 그 노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지 격한 노동에 박봉이어서인지 이래저래 승객에게 심통을 부리기도 했다. 무정차를 한다던가 몸이 굼뜬 할머니들을 타박한다던가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수첩의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밤 10시에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학교에서 정류장까지도 그다지 안전하지 않은 유흥거리를 혼자 걸어 버스를 타야 했다. 뻔히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도 두 대를 내리 놓치고, 세 번째도 왜 빨리 타지 않느냐는 기사아저씨의 타박을 들으며 버스에 올랐다.


빙 돌아 한참을 가야 하는 텅 빈 버스에 올라 뒷 좌석에 앉았다. 맨 뒤 맨 오른쪽 창가 쪽 자리였다. 앉고 보니 바로 옆 자리에 주인 잃은 삐삐가 있었다. 당시에는 삐삐가 한창 퍼져가던 중이었다. 그 삐삐를 주머니에 넣고 ‘왠지 재미있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다.


그 이튿날인가 삐삐 주인과 연락이 닿았다. 주인은 다름 아닌 스물여섯 살의 대학생이었다. 남자였다. 여중과 여고를 거쳐 무성의 존재처럼 공부에 매진하는 고3인 나에게 남대생이라니!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쾌활한 삐삐 주인은 몇 날 몇 시에 보자고 시원하게 제안했다.


그다음 날인가 방배역에서 야자를 마치고 만났다. 10시 30분쯤이었을까. 딱 그 목소리처럼 사람 좋은 웃음으로 만나자마자 감사의 표현을 하고 하고 또 했다. “너무 고맙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렇게 삐삐도 찾아주고 너무 고마워. 너는 진짜 이경규에 칭찬합시다 그런 데 나와야 돼.” 그러면서 바로 옆 레코드 가게에 가서 원하는 CD를 사주겠다고 했다. 나는 감격의 도가니탕에서 허우적대면서 “아 진짜요?!” 하면서 CD2개가 묶인 King’s Singers 아카펠라 그룹의 음반을 골랐다. 그렇게 구름을 걷는 마음으로 헤어졌다. 대단한 선행도 아니었는데 과하게 고마워하던 그 오빠가 너무 좋았다. 고등학생의 눈엔 대학생 그 자체만으로 ‘멋짐 필터’가 씌어진 채로 보여일수도 있었다.


헤어질 땐 “수능 보고 나서 연락해!”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성으로 잘해보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착하고 귀여워 보이는 동생 정도였던 것 같다. 당시 난 꾸밀 줄도 전혀 모르고, 예쁜 것과는 더더 거리가 먼, 거의 도시에서 자라는 시골쥐 느낌이었다.


정말 11월 수능을 보고 2월인가 연락해서 재회했다. 여전히 나는 영락없이 촌스러웠지만, 긴 입시의 터널을 지나 한결 밝아졌던 때였다. 삐삐 오빠는 강남역인가 종로 어딘가에서 밥도 사주고 영화도 보여줬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아무렇지 않게 ‘오빠 여자친구가.. ‘라는 이야기를 해서 멘탈이 흔들렸다. 지하철에서 헤어질 때였다. 손을 흔들며 여느 사람 좋은 미소로 “가끔씩 연락해”라고 말했다. 나는 2차로 충격을 받았다. 왜. 나.에.게. 자.주. 연.락.해.가 아니라 가.끔. 연락하라는 거지?! 지금 생각하면 정말이지 어이가 없다.



무난 무난 하루를 보내다가 나름의 빅이벤트가 생긴 던다야.
이성이라고는 단단히 벽을 치고 살다가 시간이 흘러 흘러 의외로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될 거야.
네가 수첩이나 일기장에다 끄적이며
너 자신에 대해 조금씩 더 알게 되면서
결국엔 너에게 딱 맞는 배우자를 만나게 될 거야
놀랍지 않아?
어릴 때 연예인처럼 생긴 사람만 연애라는 것을 하는 줄 알았잖아
잠시 잠깐 즐거운 만남을 가진 열아홉의 던다가 참 풋풋하다

스무 살 이후의 다양한 만남도 응원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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