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하려면 책임질 일이 있어야 하고, 책임을 감당하려면 성장해야 한다.
나에게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중요도가 낮은 업무들만 주어졌다. 너무나도 당연했다. 사회는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보고 싶다 해서 중요한 일을 쉽게 맡겨주는 곳이 절대 아니었다. 사회는 검증된 일잘러들을 좋아하고, 기회도 몰아준다. 그리고, 우리 조직에는 나보다 일을 더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덕분에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책임질 일이 적었다. 그 점이 편하고 좋기도 했다. 하지만, 책임이 주어지지 않았던 만큼 성장이 더뎌지기도 했다. 역할이 구체적이지 않으니 업무에 의욕적으로 덤벼보기도 뭐했고, 자꾸만 위축됐다.
'책임'이라는 단어는 무겁고 딱딱하다. 누구도 책임질 일을 맡는 걸 유쾌해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책임질 일 없이는 성장도 없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진행하는 업무가 아니라면 본인 역량의 최대치를 끌어내기 위해 악을 써볼 이유가 잘 없기 마련이다.
조직은 성장을 요구하지만, 그렇다고 따뜻한 마음으로 지도해주거나 차근차근 알려주지는 않는다. 조직이 개인을 성장시키는 방식은 학교처럼 보호해주고 기다려주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책임을 주고 그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이다. 매섭게 채찍질을 하고, 때론 당근을 물려준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담금질을 해 급격한 성장곡선을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사회는 냉정하고 살벌한 곳이다.
성장을 위한 나의 절박함이 충분히 잘 어필된 것인지, 아니면 짐짝처럼 멀뚱히 앉아있던 내가 불쌍해서 일을 한 번 맡겨보신 건지 모르겠지만, 어찌 됐건 나에게도 기회가 오긴 했다(8개월 정도가 걸렸다). 처음으로 프로젝트 PM에 내 이름을 올린 것이다. 그동안은 후보 선수로 열심히 벤치만 달궜다면, 그제서야 처음으로 경기에 출전하게 된 셈이다.
'진짜 내 일'이라고 생각되는 프로젝트가 생기자 두 가지 마음이 들었다.
첫 번째, 기대감. 나는 맡겨진 일을 반드시 잘 해내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노하우도 적었고 업무를 처리하는 방식도 굉장히 투박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프로젝트의 목표를 달성해 보이고 싶다는 열정에 1시간씩 일찍 나가던 출근시간을 20분 더 앞당겼다. 동료들보다 많은 부분에서 뒤처지던 내가 좋은 결과를 기대하려면 업무에 더 많은 시간을 쏟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마음은 부담감. 그동안은 크고 작은 실수들을 하더라도 쓴소리 좀 들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내 프로젝트가 생긴 이후로는 실수가 가지는 의미가 좀 달라졌다. 나의 실수가 조직에 조금은 더 직접적인 피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전에는 잘 느껴보지 못했던 책임의 무게가 버거워 괜히 혼자 서러워지고, 다운되기도 했다(사실, 나에게 요구됐던 책임이 그 정도인 건 아니었다. 잘하려는 욕심이 너무 컸기에 만들어졌던 기형적인 책임감이었다).
기대와 부담감을 오가며, 어떻게든 나에게 온 자그마한 책임을 다해내기 위해 악을 썼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인고의 시간에 자진해서 뛰어든 내가 너무 대견스럽다. 그 과정을 통해 정말 많이 성장할 수 있었으니까. 프로젝트의 결과에 상관없이 그때 내가 짊어진 책임의 무게는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결과가 실제로 나쁘지 않기도 했고).
본격적으로 성과에 대한 압박이 오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나의 업무 폼 또한 급격히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도 보지 않던 곳에서 절박하게 칼을 갈아오던 나의 날카로움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시점도 이때쯤이었다.
나는 내가 가진 '아이디어, 학습'의 강점을 이용해서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해 갔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지난 8개월 동안 다른 동료들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내용을 눈동냥, 귀동냥해가면서 머릿속으로 수백 번 시뮬레이션을 돌려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보면 더 좋지 않을까? 저런 방식을 적용해보는 건 어떨까?'
그렇게 차곡차곡 모아둔 가설들을 나에게 온 책임을 다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실하게 풀어냈다. 내 가설은 맞는 것보다는 틀린 게 더 많았다. 내가 생각해낸 방식으로 일하지 않던 데는 이유가 다 있었다. 그러한 것들을 확인해가는 과정들 하나하나가 나에겐 너무나도 소중한 경험들이었다. 업무의 맥락과 상황 전반을 보게 되니 재미도 있었다. 물론,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야만 한다는 부담감이 너무 커서 그만큼 힘들기도 했다.
내가 가진 강점과 성장을 향한 절박함, 그리고 나에게 온 책임이 어우러졌을 때 놀라운 시너지가 만들어졌다. 그걸 경험하게 된 순간, 나는 왠지 모를 희열을 느꼈다. 업무를 통해 성장한다는 것이 이런 것을 뜻하겠구나 하고 어렴풋이 감을 잡게 된 것이다.
책임을 통감할수록 그 일에 대한 고민과 몰입의 정도가 달라진다. 때문에, 무엇인가 책임질 일을 맡아 이를 성실하게 수행하다 보면 자연스레 성장이 따르게 된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된 이후로는 두렵고 피곤할지언정 절대로 내가 맡아야 할 책임을 거부하거나 회피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그 책임이 만들어낸 부담감을 견뎌야 한다는 건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성장을 위해서 성장통을 견뎌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 성장통을 극복해가며 더 많은 책임을 짊어지기 위해 계속해서 더 나은 자신이 되어가는 것, 또한 그러한 성장에 맞게 더 큰 책임을 요구받게 되는 것, 이것이 조직이 요구하는 성장의 메커니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