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언어를 쓰는데도 말이죠
이상하다. 연애 시절엔 밤새 수다를 떨 정도로 얘기가 잘 통했는데 결혼해서는 왜 이러지? 이래서 연애 따로 결혼 따로라고 하는 건가.
“말을 말자.”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이야. 소통의 단절은, 관계의 단절인데. 말을 할수록 갈등이 증폭되던 시기가 있었다. 왜 그런 걸까. 우리는 그대로인데.
원인은 대화의 ‘주제’가 바뀌어서였다. 서로에 관해서라면 속속들이 알고 공감할 수 있는데, 그 범위를 벗어나자 그 기능이 작동하지 않았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가족들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지만 그렇다고 이 문제로 우리가 이렇게 답답함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일차적인 갈등이 ‘다름’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면, 갈수록 더 문제로 느껴지는 점은 아무리 얘기를 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막막함’이었다. 다르다는 건 받아들일 수 있는데 내가 이해받지 못하는 건 서운함으로 번졌다.
‘내가 어떻게 했는데,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무나 흔한 문장이지만, 이 말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사람 하나 보고 결혼한 건 아니고, 내가 좋아서 선택한 결혼인데도 뭔가 억울하고 서운하다. 무던히 학교생활도 해 왔고, 사회생활도 잘 해왔는데 이 집에서는 나만 문제아인 것 같다. 다들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상황이 나는 이해가 안 되고, 남편은 그걸 하나씩 문제 삼는 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처음에는 결혼의 선배이자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 엄마와 얘기해봤다. 하지만 그건 엄마를 속상하게만 할 뿐,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엄마도 객관적일 수 없는 입장이었고 애써 객관적으로 조언을 해준다 해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 문제였다. 괜히 엄마까지 힘들게 했다.
다음에는 엇비슷한 시기의 결혼생활 중인 친구들과 얘기해봤다. 결혼, 시어머니, 며느리, 남편. 구성요소는 똑같은데 스토리는 제각각이다. 서로의 상황에 공감하고 안타까움을 표하며 동병상련할 순 있지만 이렇다 할 답을 줄 수는 없었다. 그때는 그래도 그게 대화가 되는 거고 소통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각자의 입장을 토로할 뿐이었다.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끼리의 공감대 형성 그 이상은 아니었다.
대화가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 이것도 결혼 전에 미처 못했던 것이었다. (왜 이렇게 미처 몰랐던 게 많은 건지..)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대화가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게 문제였다. 왜 타인들과는 그럴 수 있다고 여기면서 배우자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가장 가깝기 때문에? 배우자니까?
극단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연인이기 전에 남이었고 헤어지면 또다시 남이 된다. 그러니 타인과 대화가 통하지 않을 만큼의 가능성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주면 된다. 그러면 그렇게 서운할 일도, 그보다 더 막막할 일도 조금은 줄어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