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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크킴 Lake Kim Jun 25. 2021

공간을 이기는 대화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 주연의 로맨스 영화 비포 시리즈(Before Sunrise(1995), Before Sunset(2004), Before Midnight(2013))에서 두 남녀는 파리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기차에서 잠깐 동안 나눈 대화였지만 분명 통했음을 느낀 둘은 서로에 대해 더 알고자 우발적으로 정차역 중 하나인 비엔나에 내려 하룻밤의 여행을 시작한다. 그들의 시작이 대화였듯 그들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대화한다. 어디서 주워들은 얘기부터 시답잖아 보일 수 있는 망상까지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범죄도 액션도 마법도 없는 영화에서 두 주인공은 멋진 비엔나 거리를 계속 걸으며 충실히 대화를 나눈다. 말하고 눈을 마주치고 풍경을 바라보고 서로를 엿보고 웃고 또 말하며 그들은 서서히 연결된다.


 사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주인공들의 어마어마한 대화량을 따라가기 위해 마치 책을 읽듯 바쁘게 자막을 읽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년 동안 대여섯 번에 걸쳐 이 영화를 포기해왔다. 그러다 문득 이 영화가 생각난 건, 흔히 말하는 '인스타 감성'의 카페들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무리 예쁜 카페에 가도 기대했던 만큼 즐거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저기에 가면 행복할 거야.'라는 디즈니적 환상을 품게 했던 곳이었는데 그곳에서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가만히 앉아 커피를 마시고 공간을 감상하고 대화하는 것뿐이었다. 잘 꾸며진 공간을 감상하는 것 외에는 허름한 카페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그런 일들이었고, 사실 오랫동안 머무를 아파트의 모델하우스도 몇 분이면 다 보는 것처럼 아무리 예쁜 카페도 한 번 둘러보면 더 이상 볼 게 없었다. 그러니 커피를 마신다고 해서 그곳을 누린다는 느낌이 들었을 리가 없다. 그동안 예쁜 공간만을 찾아다녔는데 알고 보니 예쁜 게 능사가 아니었고 심지어 공간에서 박탈되어버린다면, 어떻게 해야 그 공간을 누리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들자, 바로 영화 '비포 시리즈'가 떠올랐다.


 비포 시리즈의 두 주인공은 느닷없이 '태어난 시대'에 관해 이야기하고, '행복한 부부'에 관해 이야기하고, '인생의 주체'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것도 놀이동산에서 말이다. 그들에게 장소는 수단일 뿐이다. 강가에서도 골목에서도 카페테라스에서도 그들은 쓸모없는 이야기를 계속하며 장소를 보잘것없게 만드는 동시에 특별하게 만든다.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이기에, 그 사람과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공간이 갖는 의미도 특별해지기에, 그들의 대화를 통해 비엔나의 구석구석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SNS에서 정방형의 사진 속에 완벽하게 꾸며진 카페 사진들을 볼 때마다 비포 시리즈 영화를 생각한다. 그런 카페에서 누군가는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만족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테지만 공간를 충분히 즐기는 법을 알지 못 하는 또 다른 누군가는 전시용 사진 말고는 아무 것도 얻어가지 못 했을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부터 공간을 이기는 대화를 했으면 좋겠다. 아직 하지 못 한 말이 많기에,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마음이 많기에, 수다쟁이가 되어야만 보여줄 수 있는 진솔함이 있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대화하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장소와 시간이 빛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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