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뼘, 꿈을 키우던 나의 놀이터
신혼집 계약이 끝나고 갑자기 뛰어버린 전세금 앞에서 우리는 이사를 가야만 했다. 배부른 며느리를 위해 어머님께서 발품을 팔아 얻게 된 두 번째 집은 나의 마음에 원망을 가득 채웠다. 시부모님과 남편만 믿고 맡긴 나의 문제였다. 어쩌면 당연히 좋은 선택을 해주실 거라 믿고 중요한 결정을 대신해주시길 바라는 착한 며느리가 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언덕배기 빌라촌 대신 아이가 놀 수 있는 놀이터가 있는 아파트를 준비해 주셨지만 너무 작았다. 실평수가 10평도 되지 않던 그 집은 짐들이 꽉꽉 들어차 들어가기만 해도 숨이 막혔다.
‘아이가 없었다면, 외향적인 성격이었다면 괜찮았을 수도 있어. 하지만 이곳은 너무 답답해.’
신생아와 함께 24시간을 지내는 나에게는 철창 없는 감옥 같았다. 꾸역꾸역 집어넣은 짐들에 숨을 쉴 공간도 없이 모든 것이 혼재했다. 침실은 놀이방이 되었다가 주방이 되었고, 작은 방은 옷장이 되었다가 식탁이 되었다.
‘차라리 조금 더 넓은 빌라였다면… 내가 전세를 보러 다녔다면…’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남편의 목회를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나 사역하던 교회를 그만두게 되었다. 해가 뜨고, 그 해가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뜰 때까지 셋의 움직임이 옴짝달싹 할 수 없이 빽빽하게 집을 채웠다.
일을 그만두고 몇 달 동안 우리는 철 없이 휴식의 시간을 즐겼다. 영어를 잘하는 남편의 능력으로 어딜 가도 먹고살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했다. 간간히 했던 통역 알바는 일당이 좋았고, 유명 가수의 내한 공연 같은 규모가 큰 통역도 맡게 되었다. 하지만 알바는 알바일 뿐 일이 고정적이지 않았고, 세월호 사건으로 인하여 공연이 줄줄이 취소되었다. 받았던 퇴직금의 바닥이 보이저 생계의 부담을 느끼던 남편은 할 수 있는 알바를 찾아 나섰다. 33살 적지도 많지도 않은 나이 앞에 현실의 벽을 마주했다. 혈기 왕성하던 우리는 싸우고 다독이고, 비난하고 화해했다. 풀리지 않는 현실 앞에서 남편은 마음의 굴로 들어갔고, 갑갑한 나는 숨 쉴 곳이 필요했다.
식탁이면서 선반이었던 그곳은 아무리 치워도 내가 앉을 한 뼘의 자리 밖에 없었다. 물건을 옆으로 쌓고 쌓아 헤집고 들어간 자리였다. 나는 그곳에서 현실을 피해 꿈의 자리로 들어갔다.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나를 잡기 위해서, 그림을 그렸다. 멈추고 지치지 않기 위해 간단하고 밝은 긍정의 이야기들을 그리고 써 내려갔다. 온라인에 그림을 올리고, 그림을 본 사람들의 반응으로 힘을 얻었다. 현실은 한 뼘이지만 나의 꿈은 끝없이 펼쳐진 바다였다. 아이가 잠든 새벽, 어둠 속을 기어 나와 앉은 한 뼘의 책상이 나를 숨 쉬게 해 준 놀이터이자 안식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