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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만 원으로 산 일러스트페어

한 챕터의 마침표를 찍는 데 든 비용

by 송알송알

일러스트페어를 두 번 정도 구경하러 간 적이 있다.

잘 그리는 사람도, 구경하는 사람도 많았고, 비슷비슷한 분위기 속에서

마음이 금세 지쳐버렸던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참가하는 모습을 그려보곤 했지만,

상상만으로도 기가 빨리는 느낌이라 곧 마음을 접었다.

게다가 참가비도 적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하루하루 숨 넘어가듯 살아가는 내게 ‘페어’는 멀고도 먼 일이었다.


하지만 자꾸만 마음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페어에 나가면 알 수 있어. 내 그림이 어떤지, 어떤 반응을 얻는지.

업계 사람들도 오니까 기회가 될 수도 있어.”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고 난 후 가장 어려웠던 건

“나는 어떤 스타일의 그림으로, 어느 분야에 어울리는 걸까?”

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림체는 제각각, 좋아하는 것도, 잘하는 것도 애매했다.

어떤 것을 내세워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했다.

“페어에 나가면, 적어도 그걸 알 수 있지 않을까?”


결정적으로,

AI 시대에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일까 고민했을 때,

남는 건 애매한 그림 솜씨도, 어설픈 글 실력도 아닌,

‘경험한 나 자신’ 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참가비와 각종 준비 비용까지 합쳐 200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기꺼이’ 쓰기로 마음먹었다.


막상 참가를 결심하고 나니,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어졌다.

완성된 브랜드도, 정돈된 그림체도 아니지만,

“지금의 나”를 내놓아야만 했다.


그래서 그 시기에 맞춰 독립출판물도 만들었다.

아직 준비 중인 나, 고민하는 나의 이야기.

천 명도 안 되는 팔로워, 수수한 그림.

당연히 페어에서 주목받진 않았다.

업계의 러브콜도, 팔로워 폭증도 없었다.


하지만 참 이상하다.

나흘 동안 만난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나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만화책을 사간 분,

동물 엽서를 예쁘다며 구입한 분,

“작가님처럼 그림책을 만들고 싶어요”라고 말하던 꼬마.


그들의 눈빛과 말, 짧은 대화 하나하나가

내 심지를 단단히 붙잡아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을 함께 감당해 준 가족들,

응원해 준 친구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은 나 자신이

이 200만 원을 속근육으로 바꿔주었다.


나는 만화책을 만들었고,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오랫동안 내 안에서 반복되던 고민에

작은 마침표 하나를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마침표는

내 이야기 상자를 여는 열쇠가 되었다.

드디어, 나는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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