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 들어갈 당신의 자리를 남겨두는 일
일러스트레이터, 아니 무엇이든 ‘만드는 사람’이라면
실력은 정말 중요하다.
고객이 믿고 맡길 수 있는 완성도를 갖춰야 하니까.
그래서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내 그림이 인기 없는 건 실력이 부족해서일 거야.
더 잘 그려야 하고, 더 멋지게 보여야 한다고.
그런데 ‘잘 그린다’는 건 도대체 뭘까?
페어에 나가 나흘을 보내며
나는 수많은 부스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어떤 부스엔 인파가 몰리고, 어떤 부스는 조용했다.
SNS 팔로워 수가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는
오직 그림 그 자체의 분위기와 힘만이 남았다.
(물론 가장 안 보이는 건 내 부스의 장단점이었다. )
내 주변에는 실력 있는 작가님들이 많았다.
라이브 드로잉을 선보이는 작가,
묘사력이 뛰어난 웹툰 작가,
감각적인 컬러의 초상화 작가까지.
어떻게 저렇게 잘 그리지?
입이 떡 벌어지는 그림들이 많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놀랍게도 ‘잘’에 머무르지 않았다.
어느 작가님의 그림 중에는
피자 이불을 덮고 자는 인물이 있었다.
나흘 내내 그 그림을 보며
피자와 햄버거를 좋아하는 내 아들을 떠올렸다.
단순한 선과 표정 속에
이불만큼 커다란 피자를 상상하는 아들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림은 그렇게, 누군가의 삶과 이어졌다.
반면, 실력이 완벽한 초상화를 그리는 작가님의 그림은
‘와, 정말 멋지다’라는 감탄은 있었지만
그림 속 누군가는 내 이야기가 아니었다.
기억도, 감정도, 연결되지 않았다.
그때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사랑하는 그림은
작가가 완성한 그림이 아니라,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남아 있는 그림이라는 걸.
초보 작가의 그림이 선택받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실력 부족’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자꾸만 부족함을 채워 넣으려 한다.
그림의 주체가 ‘나’가 되다 보니,
사람들이 들어올 자리를 미처 남기지 못한다.
어쩌면 좋은 그림이란
빈틈없는 완성보다
조금 어설프더라도
누군가의 마음이 살포시 들어앉을 수 있는 여백이 있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