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눈빛이 나의 정체성을 만든 순간
어린이집 입소서를 쓰면서 ‘부모의 직업’ 란에 한참을 망설였다.
‘일러스트레이터’, 혹은 ‘프리랜서’라고 쓰고 싶었지만 끝내 적지 못했다.
나는 그저 ‘가정주부’라고 썼다.
페어를 신청할 때도 생각했다.
이 많은 비용을 들여서, 내가 진짜 얻고 싶은 건 뭘까.
혹시 ‘작가’라는 타이틀을 사고 싶은 건 아닐까.
그런 이름표 하나가 나를 좀 더 나아 보이게 만들어주길 바란 건 아닐까.
페어 당일까지 마음 한편엔 씁쓸함이 있었다.
돈으로 경력을 산다는 생각, 인정받고 싶은 조급함.
‘그게 뭐라고…’ 하는 체념 같은 감정.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더 열심히 준비했다.
SNS에 꾸준히 그림을 올렸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업들로 엽서를 만들었다.
수량은 각 20장. 적지도 많지도 않게.
“아무도 안 사면 어쩌지… 유령 부스가 되면 어떡하지?”
걱정을 안고 책상 위에 작은 우주를 펼쳤다.
하루 평균 매출은 15만 원 정도.
엽서, 미니북, 만화책—하루 열 명 남짓한 손님들이 물건을 사갔다.
팔로워도 늘지 않았고, 러브콜도 없었다.
페어만 놓고 보면, 실패라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자신감을 얻었다.
왜일까?
나는 나를 믿어주는 단 한 사람이 있을 때
그 믿음 하나로도 버틸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꿈을 품었을 때,
그 꿈을 진심으로 지지해 준 친구 두 명이 있었다.
그 마음이 지금까지 나를 밀어준 힘이 되었다.
이번엔, 다섯 명의 낯선 사람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작가님의 책을 읽고 제 이야기를 찾아보고 싶어요.”
“그림이 너무 예뻐요.”라며 엽서를 사간 관람객
“저도 이런 그림책을 만들고 싶어요!”라며 눈을 반짝이던 아이
미니북을 자신의 작업실에 디피해 SNS에 올려준 작가님
“작가님 책 기다렸어요.”라는 말과 함께 책을 사간 독자
이 다섯 사람 덕분에
나는 나 자신을 ‘작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내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니!”
“내가 애정을 둔 스타일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다니!”
그러자 마음이 달라졌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도 괜찮겠구나.”
“다섯에서 여섯이 되고, 여덟, 열… 그렇게 늘어나겠지.”
이제는 무대가 두렵지 않다.
그림을 좋아해 줄 누군가를 만나러 또다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