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좋은 날, 가을 가을 거리는 가을입니다.
나의 언어는 빈약하여 이 햇살과 바람과 구름과 하늘과 바다, 꽃과 나무와 풀들의 움직임을 어떻게 표현하지 못하겠습니다.
가을 산길을 걷다 보면 길섶에 하얗게, 또는 보라빛 구절초가 피어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맙다. 참 고운, 단아한, 은은한 네가 있어서 산길이 심심하지 않아.'
나는 하얀 구절초를 참으로 좋아합니다. 홑꽃잎이 가지런하고 맑고 깨끗한 모습이 보아도 보아도 좋기만 합니다. 질리는 법이 없습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절대로 누추한 법이 없습니다. 소담함과 단아함이 가을 길섶과 바람과 풀들과 잘 어우러집니다. 배경이 되기도 하고 주인공이 되기도 합니다.
바람이 좋습니다. 벌써 바람에서 서늘함이 느껴집니다. 모자를 눌러쓰게 하고 옷깃을 여미게 하는 바람 덕분인지 하늘은 더 파랗습니다. 바람이 공기를 깨끗하게 닦고 지나간 모양입니다. 올려다 보고 또 보아도 저 파랗고 맑은 하늘을 자꾸 보고 싶어 집니다. 구름은 또 어떤가요. 바람에 따라 하얀 구름이 천천히 모습을 바꾸며 유영합니다. 덩달아 마음도 자유로워집니다. 바람은 억새의 어깨를 두드리고 춤추게 합니다. 바람이 없었다면 얼마나 답답했을까. 흔들림이 없다면, 마치 죽은 듯하지 않을까. 바람을 보며 흔들리며 흔들리며 피는 모든 생명이, 흔들리며 흔들리며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의 삶이, 그 자체로 아름답고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길을 걷다 떨어진 밤톨 한 알 주었습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습니다. 밤나무. 어린 날 밤은 설렘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웃집 밤밭에 떨어진 밤을 몰래몰래 줍는 일이 가슴 콩닥거리면서도 벅찬 일이었습니다. 다른 열매와 다르게 갈색의 탱글거리는 이 열매는 어린 나에게 매우 매력적인 열매였습니다. 아직도 나의 몸은 어린 날을 기억하고 있나 봅니다. 어느 시골 마을길이나 둘레길을 걷다 운 좋게 밤나무가 있는 길을 걷게 되면 나도 모르게 '어디 떨어져 있나?' 하며 허리를 굽히게 됩니다.
"여기 여기. 여기 봐 봐."
이런 내 마음을 알고 있었다는 듯 신랑이 나를 부릅니다.
"세상에, 이건 찐 인걸. 예쁘기도 해라."
밤송이가 밤톨 세 개를 잘 키웠네요. 보기만 해도 꽉 차오르는 것 같습니다. 계절이 지남에 순응하는 자연의 섭리입니다.
어린 날 우리 집 대문 밖에는 키 큰 감나무가 있었습니다. 감나무를 통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일까요. 가을날 붉게 익어가는 감은 저를 어린 날로 회귀하게 합니다. 하얀 감꽃이 피고, 쪼그맣고 파란 어린 감이 감꽃을 떨구고 몸집을 불리며 여름을 지나고, 찬바람 불기 시작하면 발그스럼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하지요.
"감색이 정말 곱다."
듬성듬성 집들이 이어지는 시골 마을길을 걸으며 '우리나라의 가을, 한국의 가을 정취는 감이 익어가는 풍경이지' 하고 생각합니다. 연달아 곶감이 주렁주렁 달린 겨울날의 처마 풍경을 떠올립니다. 아버지 어머니 곶감 끼우고 어린아이들 곶감 익기 무섭게 솔랑 솔랑 빼먹는 정겨운 장면.
* 가을 동안, 가을 가을 거리는 가을의 정경을 마음껏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