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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T Apr 03. 2022

이촌동 연가 (6)

■ 2000년 초 사라진 외인 아파트

현재 이촌동의 LG 자이 아파트가 있는 지역 일대에는 원래 한강 맨션과 같은 , 즉 1970년에 완공된 외인 아파트가 있었다.  외인 아파트도 한강 맨션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사라진 대한 주택 공사에 의해서 건설되었고 아파트 층수나 외관도 역시 한강 맨션과 매우 흡사했었다.


결국 두 아파트는 같은 해 태어난 쌍둥이 같은 아파트였던 셈인데  두 아파트  외인 아파트는 2000년 초 재건축이 추진되면서 먼저 철거고 그 자리에 현재의 자이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사진) 현재 LG 자이 아파트 단지 모습. 과거 이 공간에 외인 아파트가 1970년부터 2000년까지 30년 존재했었다.


사진) 한강에서 바라본 LG 자이 아파트 모습. 2000년까지 외인 아파트가 있던 공간이다.


(70년대 외인아파트 항공뷰 모습)

https://theme.archives.go.kr/next/photo/house03List.do?page=2


결국 외인 아파트는 완공 후 30 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셈인데, 이와는 달리 동일한 시기에 완공된 형제 같은 아파트인 한강 맨션은 완공 후 50 년도 넘는 2022년 현 시점까지도 남아 다. 물론 한강 맨션도 오래전 재건축이 이미 결정된 바 머지않아 먼저 떠난 외인 아파트처럼 역시 과거 기억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한편 먼저 기억 속으로 사라진 외인 아파트는 그 시절 한국 수출 및 산업급속히 성장함에 따라 국내 거주 외국인도 매우 빠르게 늘어나고 있던 실정에서 외국인들에게 서구식 주거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서 건설된 것으로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급하게 건설된 아파트였다고 한다. 


즉, 1970년 초 대통령 지시로 공사가 착공됐고 1년도 채 안돼서 그해 말에 완공된 대단위 아파트 단지였던 것이다. 그리고 본인 지시로 매우 급하게 건설된 아파트라서 그런지 아파트 준공식에도  대통령이 직접 참석했었 한다.


그런데 아래 1970년 1월 기사를 보면 500 세대 거주할 외인 아파트 건설에 당시 약 24이 소요됐다 하니 요즘 강남아파트 1채 값도 안 되는 금액에 아파트 1채도 아니고 무려 500여 세대가 입주할 수 있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건설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 시절 바로  한강 맨션 32평 분양가가 395만 원이었다 하는 신문 기사도 남아있으이해가 되는 비용인 것  같다. 50여 년 사이에 서울 아파트 가격은 정말 엄청나게 오른 셈이다.


(외인 아파트 건설 관련 1970년 기사)

1. http://m.mk.co.kr/onews/1970/163602

2. https://www.joongang.co.kr/article/1265393#home

(외인 아파트 재건축 관련 1999년 기사)

https://www.donga.com/news/Economy/article/all/19991024/7479452/1


한편 지금은  자이 아파트와 한강 맨션 사이에 한강으로 연결되는 2차선 도로가 뚫려 있어서 이 두 단지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70년대에는 이 도로가 없었고 따라서 한강 맨션과 외인 아파트는 어른 키 정도의 낮은 담을 사이에 두고 서로 붙어 있었다. 즉 당시 내가 살던 한강 맨션 17동 바로 옆이 미국인 등 외국인들이 주로  외인 아파트여서 나 같은 아이들이 낮은 담 하나만 넘으면 외국인이 사는 세상으로 바로 갈  있는 그런 곳이었던 것이다.


사진) LG 자이 106동 앞에서 한강 맨션 17동을 찍은 사진. 현재는 두 아파트 사이에 도로가 있지만 70년대에는 이 두 아파트는 도로 없이 붙어있었다.


(한강 맨션과 외인 아파트가 서로 붙어 있는 70년대 모습)

※ 사진 오른쪽 3개 열이 한강 맨션, 왼쪽이 외인 아파트

https://mobile.twitter.com/salguajc/status/1081174018676338688?lang=gl


 외인 아파트에는 주한 미국인도 많이 거주했는데 전술한 것처럼   아파트가 워낙 가깝게 붙어 있다 보니 상호  접촉도  자주 있었때로는 겨울에 눈이 이거나 하면 패거리로 몰려서 한강 맨션의 한국인 아이들과 외인 아파트 미국인 아이들 간 눈싸움을 펼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눈싸움할 때 꽤나 의외의 사실을 체험하기도 했는데 미국인 아이들이 눈에다 돌을 집어넣어서 우리에게 던지곤 했던 것이었다. 하얀 피부에,  잘 생기고, 체격도 멋진 그 시절 우리가 동경하던 미국이란 부자 나라에서 온 아이들이었는데 하는 행동만은 예상외로 대단히 비열했던 다.


그들이 던지는  돌 들어간 눈덩이에  되결국 돌로 맞는 것과 전혀 아무런 차이가 없었는데 그 돌에 우리가 몇 번 호되게 당하자 결국 우리도 나중에는 그들이 했던 것과 똑같이 우리가 던지는 눈에도 돌을 넣어 던지기 시작했다. 태평양 바다 건너 멀리 미국에서 온 아이들의 못된 짓은 한국 아이들에게도 바로 전염이 되었이다.


그러다 마침 어떤 미국 아이가 고립되어서 한강 맨션 17동 옥상에서 우리 한국인 아이들에게 포위되어 포로처럼 잡힌 상황에 빠졌다. 그때 아이들이 그간 우리가 당한 보복으로 그들이 했던 것과 똑같이 돌이 들어간 눈으로 포로가 된 그 미국 아이를 둘러싸고 집중 공격하려 했다.


그렇지만 공포에 휩싸인 눈으로 간절히 우리를 바라보던 그 미국 아이가 갑자기 너무 불쌍하게 보여 내가 나서서 한 번만 봐주자고 적극 호소 포로(?)에 대한 잔인한 공격 시도가 중단된 일이 있었다.


그런 내가 너무도 고마웠는지 그날 눈싸움이 끝나고 헤어질 때 미국 아이는 내게 자기 집으로 놀러 오라고 했고 실제 나는 그를 따라서 담을 함께 넘어 그의 집으로 갔다.


그렇게 얼떨결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국인이 사는 주택에 가보게 되었는데 그 아이 집에 가보니 역시 한국인이 사는 집과는 정말 많이 달랐다. 우선 먹는 음식들이 너무 달라서 그런 무엇보다도 집 안에서 풍기 냄새가 크게 달랐고,  집안 바닥이 온통 푹신푹신한 카펫으로 깔려 있어서  집 바닥을 매일 물걸레질하는 것만 봐왔던 내게는 매우 신기한 모습이었다.


당시 당연히 나는 영어를 전혀 못했고 그 아이도 한국어를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아이와의 대화는 어느 정도는 가능했는데, 이유는 그가 영한/한영사전을 갖고 있어서 그 사전을 통해서 단어들을 서로 보여주면서 어렵게나마 의사 소통을 일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날 헤어지면서 아이는 이후 다시 놀러 오라고 사전을 보여주며 말을 했고 나는 그때 알았다고 답은 했는데 왠지 뭔가가  불편해서 이후에는 가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는 핸드폰, 카톡, 이메일 같은 것들 전혀 없던 시절이었니 그 아이와의 연락은 그날을 마지막으로 그렇 끊어졌다.


비록 친구라고까지 언급정도는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그 아이가 내게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화했던 외국인이었던 셈이다....


(과거 외인아파트 모습, 링크 중간 부분)

https://m.dcinside.com/board/dcbest/11028


외인 아파트가 바로 집 옆에 있다 보니 70년대 그 시절에는 한국에서는 아직 별로 알려지지 않았'핼러윈데이' 같은 서구식 기념일좀 더 일찍 경험할 수 있었다.


친구들 말이 그날은 외인 아파트에 가서 그저 돌아다니기만 해도 당시 한국에서는 꿈에서도 맛보기 어려운 맛있는 미제 사탕을 가득 받을 수 있다고 했고, 결국  미제 사탕 유혹에 빠져서 친구들과 함께 가면을 뒤집어쓰고 외인 아파트 안에 있는 가정돌아다니면서 온갖 미제 사탕을 듬북 받아 오기도 했던 것이었다.


당시 한국에는 그런 고급 사탕이 전혀 없던 시절이라 그때 미국인 집에서 선물 받은 사탕들은 정말 신천지 사탕 같이 너무도 맛있었는데  기억이 아직도 한강 맨션 살던 어린 시절의 소확행과 같은 행복한 기억으로 아련히 남아있다.


한편 가면을 쓰고 그렇게 사탕 받으러 돌아다닐 때 미국인 아이들과 마주치면 그들이 말을 걸어오기도 했는데, 우리가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답변을 못하면, 자기들끼리 '쟤들도  한국 아이들이다"라고 쑥덕이면서 조롱하고 지나가기도 했다. 미국과 한국의 경제력이나 생활 수준이 워낙 차이가 던 시절에 그래도 선진국인 미국의 그 달콤한 고급 미제 사탕이 먹고 싶었으니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했던 수모였 같은데 시는 바구니에 점점 쌓여가는 미국제 사탕에만 온통 눈이 멀어서 그러한 수모를 수모로 생각하지도 못했던  같다.


 기억나는 것이 70년대 그 시절에 이촌동 동네를 오가다 미국인 여학생들과 마주치면 그들의 외모뿐 아니라 피부가 너무도 고 깨끗해 보여 좀 신기생각까지도 들곤 했던 기억도 있다. 그렇지만 나중에 성인이 이후에 알고 보니 실제로는 백인의 피부보다는 한국인의 피부가 훨씬  맑고 부드럽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단지 70년대 당시는 평균적으로 볼 때 미국 여학생과 한국 여학생 간 생활 수준 차이가 워낙 크다 보니 미국 학생들이 피부 관리에 시간과 돈을 더 많이 투자해서 훨씬 깨끗한 피부를 가진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던 것이. 요즘 해외의 일부 국가에서 한국인 특히 한국 연예인들의 피부를 너무도 부럽게 보는 것과 비슷한 경우였을 것이다.


실제 똑같은 한국인이라도 과거 사진들을 보면 조선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70~80년대 사진 속 한국인 피부와 2022년 한국인 피부가 너무나도 다르게 보이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요즘 사람들 남녀 불문하고 피부관리에 얼마나 많은 신경을 쓰고 또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가? 40~50여 년 전 이촌동 거리에서 부자 나라에서 온 미국인 학생들을 바라보며 피부가 참 좋다고 감탄하고 신기해하던 70~80년대 상상조차 못 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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