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외인 아파트는 완공 후 30 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셈인데, 이와는 달리 동일한시기에완공된 형제 같은 아파트인한강맨션은완공 이후 50 년도 넘는 2022년 현 시점까지도 남아 있다.물론 한강 맨션도 오래전 재건축이 이미 결정된 바 머지않아 먼저 떠난 외인 아파트처럼 역시과거 기억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한편 먼저기억 속으로 사라진 외인 아파트는그 시절 한국수출 및 산업이 급속히성장함에따라 국내 거주 외국인도 매우 빠르게 늘어나고 있던 실정에서외국인들에게 서구식 주거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서 건설된 것으로 박정희대통령지시로급하게건설된아파트였다고한다.
즉, 1970년 초에 대통령 지시로 공사가 착공됐고 1년도 채 안돼서 그해 말에 완공된 대단위 아파트 단지였던 것이다.그리고본인 지시로 매우 급하게건설된 아파트라서 그런지 아파트준공식에도 박대통령이 직접 참석했었다한다.
그런데 아래 1970년 1월 기사를 보면 500 여 세대 거주할 외인 아파트 건설에 당시약 24억 원이 소요됐다 하니 요즘 강남아파트 1채 값도 안 되는 금액에 아파트1채도 아니고 무려 500여 세대가 입주할 수 있는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건설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 시절 바로 옆 한강 맨션 32평분양가가단 395만 원이었다하는 신문 기사도 남아있으니 이해가 되는 비용인 것 같다.50여 년 사이에서울아파트 가격은 정말 엄청나게 오른 셈이다.
한편 지금은이자이 아파트와 한강 맨션사이에한강으로 연결되는 2차선도로가 뚫려 있어서 이 두 단지는그도로를 사이에 두고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70년대에는 이 도로가 없었고 따라서 한강맨션과 외인 아파트는 어른 키 정도의 낮은 담을 사이에 두고 서로 붙어 있었다. 즉 당시 내가 살던 한강맨션 17동 바로옆이미국인 등 외국인들이 주로 살던외인아파트여서나 같은 아이들이 낮은 담 하나만 넘으면외국인이 사는 그 세상으로 바로 갈 수 있는 그런 곳이었던 것이다.
사진) LG 자이 106동 앞에서 한강 맨션 17동을 찍은 사진. 현재는 두 아파트 사이에 도로가 있지만 70년대에는 이 두 아파트는 도로 없이 붙어있었다.
이 외인아파트에는주한 미국인도 많이 거주했는데 전술한 것처럼 이두 아파트가 워낙 가깝게 붙어 있다 보니 상호 간 접촉도 꽤자주 있었고 때로는겨울에 눈이쌓이거나 하면 패거리로 몰려서 한강 맨션의 한국인 아이들과 외인 아파트 미국인 아이들 간 눈싸움을 펼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눈싸움할 때 꽤나 의외의 사실을 체험하기도 했는데 미국인 아이들이눈에다 돌을 집어넣어서 우리에게 던지곤 했던 것이었다. 하얀 피부에, 참 잘 생기고, 체격도 멋진 그 시절 우리가 동경하던 미국이란 부자 나라에서 온 아이들이었는데 하는 행동만은 예상외로 대단히비열했던 셈이다.
그들이 던지는 그돌 들어간 눈덩이에 맞게 되면 결국돌로 맞는 것과 전혀아무런 차이가없었는데그 돌에 우리가몇 번 호되게 당하자 결국우리도나중에는 그들이했던 것과똑같이 우리가 던지는 눈에도돌을 넣어 던지기 시작했다.태평양 바다건너그 멀리 미국에서 온 아이들의 못된 짓은한국 아이들에게도 곧바로 전염이 되었던 셈이다.
그러다 마침어떤 미국 아이가 고립되어서한강 맨션 17동 옥상에서 우리 한국인 아이들에게 포위되어 포로처럼잡힌 상황에빠졌다.그때 아이들이 그간 우리가 당한 보복으로 그들이 했던 것과 똑같이 돌이 들어간 눈으로 포로가 된 그 미국 아이를 둘러싸고 집중 공격하려 했다.
그렇지만공포에 휩싸인 눈으로 간절히 우리를 바라보던 그 미국 아이가 갑자기 너무 불쌍하게 보여 내가 나서서 딱 한 번만 봐주자고적극호소해 그포로(?)에 대한 잔인한 공격 시도가 중단된 일이 있었다.
그런 내가 너무도 고마웠는지 그날 눈싸움이끝나고헤어질 때그 미국아이는내게 자기 집으로놀러 오라고 했고 실제나는 그를 따라서담을 함께 넘어그의 집으로 갔다.
그렇게얼떨결에태어나서 처음으로미국인이 사는 주택에 가보게되었는데 그 아이 집에 가보니 역시 한국인이 사는 집과는 정말많이 달랐다. 우선 먹는 음식들이 너무 달라서 그런지 무엇보다도 집 안에서풍기는 냄새가 크게 달랐고,또집안바닥이 온통푹신푹신한카펫으로깔려 있어서 집 바닥을매일물걸레질하는것만 봐왔던 내게는매우신기한모습이었다.
당시 당연히 나는 영어를 전혀 못했고 그 아이도 한국어를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아이와의 대화는어느 정도는가능했는데, 이유는 그가 영한/한영사전을 갖고 있어서 그 사전을 통해서 단어들을서로 보여주면서 어렵게나마의사소통을일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날 헤어지면서 그 아이는 이후 다시 놀러 오라고 사전을 보여주며 말을 했고나는 그때 알았다고 답은 했는데 왠지 뭔가가좀 불편해서 이후에는 가지 않았다. 그리고당시는핸드폰, 카톡, 이메일같은 것들이 전혀없던시절이었으니 그아이와의연락은그날을 마지막으로그렇게끊어졌다.
비록 친구라고까지언급할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어쨌든그 아이가 내게는 태어나서 처음으로대화했던 외국인이었던 셈이다....
외인 아파트가 바로 집 옆에 있다 보니70년대 그 시절에는 한국에서는 아직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핼러윈데이' 같은 서구식 기념일도 좀 더 일찍 경험할 수 있었다.
친구들 말이 그날은 외인 아파트에 가서 그저 돌아다니기만 해도 당시 한국에서는 꿈에서도 맛보기어려운 맛있는미제 사탕을 가득 받을 수 있다고했고, 결국그 미제 사탕 유혹에 빠져서 친구들과함께가면을뒤집어쓰고외인 아파트 안에 있는 각 가정을 돌아다니면서온갖 미제사탕을 듬북 받아 오기도 했던 것이었다.
당시 한국에는 그런 고급 사탕이 전혀 없던 시절이라 그때 미국인 집에서 선물 받은 사탕들은 정말 신천지 사탕같이너무도맛있었는데그기억이 아직도한강 맨션 살던 어린 시절의 소확행과 같은 행복한 기억으로아련히남아있다.
한편 가면을 쓰고 그렇게 사탕 받으러 돌아다닐 때 미국인 아이들과 마주치면 그들이 말을 걸어오기도 했는데, 우리가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답변을 못하면, 자기들끼리 '쟤들도또 한국 아이들이다"라고 쑥덕이면서조롱하고 지나가기도 했다. 미국과 한국의 경제력이나 생활 수준이 워낙 차이가있던 시절에 그래도 선진국인 미국의 그 달콤한 고급 미제 사탕이 먹고 싶었으니 어쩔 수없이 겪어야 했던 수모였던 것같은데당시는 바구니에 점점쌓여가는 미국제 사탕에만온통눈이 멀어서그러한수모를수모로 생각하지도못했던것 같다.
또 기억나는 것이 70년대 그 시절에 이촌동 동네를 오가다 미국인 여학생들과 마주치면 그들의 외모뿐 아니라 피부가 너무도맑고 깨끗해 보여 좀 신기한 생각까지도들곤했던 기억도 있다. 그렇지만 나중에 성인이 된 이후에 알고 보니 실제로는 백인의 피부보다는한국인의 피부가 훨씬 더맑고 부드럽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단지 70년대 당시는 평균적으로 볼 때 미국 여학생과 한국 여학생 간 생활 수준 차이가 워낙 크다 보니 미국 학생들이 피부 관리에 시간과 돈을 더 많이 투자해서 훨씬 더 깨끗한 피부를 가진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던 것이다. 요즘 해외의 일부 국가에서 한국인 특히 한국 연예인들의 피부를 너무도부럽게 보는 것과 비슷한 경우였을 것이다.
실제 똑같은 한국인이라도 과거 사진들을 보면 조선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70~80년대 사진 속 한국인 피부와 2022년 한국인 피부가 너무나도다르게 보이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요즘 사람들 남녀 불문하고 피부관리에 얼마나 많은 신경을쓰고 또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가? 40~50여년 전 이촌동 거리에서 부자 나라에서 온 미국인 학생들을 바라보며 피부가 참 좋다고 감탄하고 신기해하던70~80년대에는상상조차못 했을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