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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T Apr 10. 2022

이촌동 연가 (7)

■ 90년대 말 사라진 한신 아파트

한강맨션에 살다가 '한신 아파트'라는 곳으로 이사를 다. 한신 아파트는 1976년 완공된 아파트로 현재는 '삼성 리버 스위트' 아파트가 있는 곳에 있던 아파트인데 1990년대 말 재건축으로 철거됐고 2002년 그 자리에 현재의 삼성 리버 스위트가 들어서게 되었다. 한신 아파트는  20여 년 간, 비교적 짧게 이촌동에 존재했다 사라진 아파트였던 셈이다.


사진) 사진에 보이는 골목길 끝부분에 있는 중경 고등학교 맞은편한신 아파트가 있었다. (2021. 12월)


한신 아파트는 총세대수가 100가구 정도로, 기억이 맞다면 동수가 5개 동인가밖에 안됐다.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한강 맨션에 살다 갑자기 경제적인 어려움이 발생해 이사를 가야 했는데 집을 찾지 못해 한참을 고생하다가 어렵게 이 한신 아파트를 정말 운 좋게 매우 저렴한 가격에 되었다고 하셨다.


그런데 어떻게 저렴한 가격에 한신 아파트를 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아파트는 기존에 살던 한강맨션보다 면적이 더 넓었고 그러다 보니, 방도 더 많아서 당시 어려운 형편에 월세를 받고 방하나를 임대해 주기도 했었다. 그때 우리 집에 들어와서 방을 임차 거주했던 사람들은 지금도 기억나는데 대학 교수와 호텔 직원 등이었다. 연세가 다소 있으셨던 교수님은 좀 깐깐한 성격이셨고, 호텔 직원은 두 명이 한 방을 사용했는데, 나중에 좀 크고 나서 생각을 해 보니 그들이 당시 보여준 행동으로 판단해 봤을  호텔 직원 남성은 동성애자였던 것 같았다. 최근의 상황처럼 공개적이지는 않았지만 70년대에도 이미 성소수자는 분명 존재했었던 것이다.

 

한편 한신 아파트 거주할 때 찍은 사진을 열심히 찾아보니 달랑 두장 남아 있는데, 비록 찍은 시점은 다른 것 같지만 신기하게도 사진을 찍었던 장소는 동일하다. 아래의 사진이 바로 그 사진인데, 누님과 동생이 거실 소파의 같은 자리에 앉아서 찍은 사진들이다.


 사진 속에 존재하 공간과, 벽에 걸린 액자, 지구본, 전등, 바둑판 모두 다 기억이 나는데 안타깝게도 이제는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전부 없어져버렸다. 떠나가버린 과거 70년대 기억처럼 그 시절 한신 아파트에 있던 물건 모두 없어져버렸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번째 사진 경우에는 물건뿐만 아니라 사람 자체부터 사라져 버렸다. 사진 속에 있는 동생이 46살 아직은 한참 더 살아야 할 나이에 뇌출혈로 한순간에 세상을 먼저 떠났던 것이다...


사진) 한신 아파트 거실에서 찍은 누님 사진. 1973~4년경 사진으로 보인다.


사진) 같은 장소에 앉아 찍은 동생 사진. 사진과 같이 이 사진도 역시 1973~4년 경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동생 경우 사진 찍으면서 햇살이 너무 강해 눈을 거의 감고 찍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아파트 거실은 햇살이 정말 잘 들어오던 그런 구조였던 기억이 있다. 막힐 것 하나 없이 탁 트인 한강 위 뜨거운 태양에서 내리꽂강렬한 70년대 이촌동 햇살의 기억은 아직도 뇌리에 짙게 남아있다....


사진)  사진 속 작은 초등학생이 성장  몸무게 90kg이 넘는 어른이 돼 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에 찍은 사진, 40대 나이 동생 모습이다 (왼쪽), 2009년 46세에 사망  유해가 안치돼 있는 동생의 납골당 모습 (오른쪽) 동생 인생은 그렇게 짧고 허무하게 흘러갔다....


한신 아파트에 거주할 때 많은 일들을 겪었겠지만  5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시점에 되돌아보면 대부분의 일들은 이미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다만, 지금도 잊지 못하는  강인한 기억이 몇 가지 남아있는데, 아래  가지인 것 같



집안에 빨간딱지가....


하나는 '집달리'에 대한 기억이다. 요즘에는 '집행관'이라고 하지만 과거 그 시절에는 '집달리'란 용어로 불리던 들이 있었다. 이분들의 업무는 법원의 결정 사항들집행하시 것이었는데 바로 분들과 분들이 강제 집행했던 70년대 빨간 압류딱지에 대한 기억이다.


그 시절 아버님께서는 운수사업을 시작하려는 너무 가까운 친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보증을 섰던 바가 있다. 그런데 그 친척의 사업이 망해 보증을 섰던 아버님까지 보증하신 만큼 금전적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금액을 대신해서 납부하지 못하게 5~6명의 집달리 분들이  아파트 우리 집으로 들이닥쳐 시뻘건 '압류'라는 딱지를 집안 온갖 가재도구에 붙이는 사건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나지만 심지어 이불에도 그 빨간 딱지가 붙여지기도 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었다.


그때 집에 아버님은 안 계셨고 어머님과 나 둘만 있었는데 어머님께서 때로는 반항도 하시고 때로는 우시기도 하셨던 것을 봤던 쓰라린 기억이 있다. 당시 어렸던 내게도 살면서 그런 장면은 처음이었고 그 장면이 너무도 충격적이었는지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간 지금도 그때 그 장면은 뚜렷이 기억이 난다. 빨간딱지가 온 집안에 난무하던 모습은 어린 아이에게 그만큼 오랜 상처로 남아있었던 셈이다....



'고양이'라는 '영'


또 다른 기억은 고양이에 대한 기억이다. 고양이를 때로는 영물(靈物)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실감했던 경우였다. 어느 날 집 현관을 열었는데 갑자기 어디서 왔는지 너무도 작고 귀여운 새끼 고양이  마리가 집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홀로 들어온 새끼 고양이가 몹시 불쌍해 보여 일단 햇살이 가득한 베란다에 종이 박스로 임시 집을 만들어 주고 물과 음식을 주었다. 그리고 근처 여기저기 문의를 해서 고양이 주인을 찾았결국 그 고양이는 3~4일 정도를 우리 집에 머물다가 주인에게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이후 우리는 그 일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2~3년 후에 또 다른 일이 발생했다. 역시 어느 날 현관문을 여는데 갑자기 발 근처로 뭔가 시커먼 큰 물체가 불쑥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놀라서  자세히 보니 좀 무서워 보일 정도의 큰 고양이였는데 그 고양이는 일말 망설임도 없이 바로 베란다로 가서는 마치 꽤 익숙한 듯 한 구석에 가서 자리를 잡고는 너무나도 태연하게 앉아있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못 해 황당해하고 있었는데 그 고양이가 앉아 있는 곳을 보니 한 가지 기억 문뜩 떠올랐다. 바로 몇 년  우리 집에 잠시 머물렀새끼 고양이를 위해 종이 박스로 임시 집을 만들어 주었던 곳이 바로 그 자리였던 이다. 결국 오래전 자신이 매우 어리고 배고플 때 따뜻한 햇살 아래서 물과 음식들을 받아먹고 또 사랑까지 듬뿍 받았던 기억 속  장소를 몇 년이 지나서도 그 고양이는 다시 찾아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고양이는 이미 덩치가 너무 서 몇 년 전에 봤던 그 귀엽고 작은 새끼 고양이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는데 그러한 사연파악하고 나니 오랜만에 다시 만난 고양이가 반갑기도 지만 한편으로는 수년 전 기억을 전혀 잊지 않고 간직하다가 다시 돌아와 과거 그때 그 자리에 시침 뚝 떼고 앉아있는 모습에 사실 섬뜩하기도 했었다.


강아지와는 다르게 고양이를 영물이라고 하는 데는 분명히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아파트 안의 두 마리 원숭이


마지막 기억은 '원숭이'다. 당시 아버님은 퇴직 후에 경기도 용인에서 주말 농장을 하셨는데, 그 농장에 작은 동물원을 건립하신다고 동물을 일부 구하셨고 그중에는 원숭이도 한 쌍이 있었다. 그런데 동물원이 완성될 때까지 그 원숭이를 보관할 장소가 마땅치 않자, 결국에는 우리가 살았던 한신 아파트 집으로까지 그 원숭이 두 마리를 데려 오셨다.


우리 가족은 아버님의 그런 결정에 사실 모두 반대를 했다. 하지만 가장이신 아버님 의지를 좀처럼 거스를 수가 없었던 입장이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정당당하게 월세 내고 문간방에 살고 있던 세입자는 우리와는 처지가 달랐다


대학 교수였던 그는 원숭이를 집 안에 들여놓으면 그 집 안 모든 사람들운수에 좋지 않다고 적극적으로 반대를 했던 것이었. 물론 사실 이것은 그저 표면적 이유였을 뿐이고 실제로는 원숭이 우리가 아파트 입구 현관 바로 앞에 있는 자신의 방과 너무도 가까운 곳에 놓여있으니 그것이 싫었던 것이었다.


그의 반대가 우리에게도 충분히 이해됐던 것이 원숭이 우리 근처에 가면 우선 냄새가 매우 심했다. 게다가 두 원숭이가 루 종일 만들어내는 소음이 결코 지 않았다. 떳떳하게 월세를 내던 그로서는 그처럼 열악한 조건받아들이기가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실 안쪽 한복판으로 그 원숭이 우리를 들여놓을 수도 없었던 아버님은 그 우리를 그대로 집 현관 옆에 두었고 그것이 싫었던 세입자는 결국 우리 집을 떠나 이사를 갔다. 이후 다른 세입자를 한동안은 찾지 못했으니 원숭이를 택한 대신 매달 들어오던 월세를 모두 몽땅 날린 셈이었다.


하여간 그 원숭이 두 마리가 한동안 한신 아파트 우리 집에 살았던 덕에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안면 표정으로 전하는 원숭이들의 애정 표현법을 좀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있었고, 이후에는 원숭이들과 표정으로 정을 교환하기도 했었다.


지금까지 그 두 마리 원숭이들의 얼굴과 표정이 기억나는데 특히 너무도 자주 수컷에게 공격받고 도망만 다니던 불쌍한 암컷의 애처로운 표정을  자주 보게 되면서 동물 세계는 결코 평등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실제 사례들을 보면서 깨우쳤 기억도 있다. 암컷 원숭이 꼬리 끝부분은 수컷에 반복적으로 물려서 언제나 피로 물들거나 진물까지 흥건한 상태가 지속되었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힘이 좀 더 센 수컷은 집요하게 암컷의 꼬리만을 집중적으로 물어댔다.


수컷 원숭이는 그만큼 잔인했던 것인데, 사실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간들의 세상도 원숭이 세상과 크게 다르다고 말수는 없을  다. 어쩌면 오히려 더 잔인할지도.....


어쨌든 다행히 동물원이 빠르게 완성되어 원숭이 두 마리는 아파트에 있던 비좁은 우리에서 마침내 벗어나서 훨씬 넓은 용인 주말 농장 동물원으로 이송되었고 이촌동 한신 아파트 집  한복판에서 야생 원숭이를 두 마리나 길렀던 무모 행위도 마침내 종결되었다.


사진) 아버님께서 운영하시던 용인의 주말 농장에 동물원 공사가 진행되는 모습 (사진 왼쪽 둥근 탑 부분). 집에 있던 원숭이들은 이 동물원이 완공된 이후 이곳으로 이송되었다.


사진 오른쪽 끝에 계신 분이 2001년 76세로 돌아가신 아버님이신데 이 사진은 연세 50 즈음에 찍으신 사진이다. 이 주말 농장은 아버님 인생 후반의 온갖 정성이 너무나도 짙게 새겨져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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