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LT Apr 24. 2022

이촌동 연가 (9)

■ 복지 아파트, (정우 맨션) - 2/2

1975. 3월부터 1979. 1월까지 4년   이촌동 복지 아파트에서 거주했다. 그 시절은 내가 중,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로써  인생에 있어서는 가장 민감하고 애틋한 사춘기 시절이었다. 요즘은 초등학생 부터 사춘기를 겪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70년대는 중, 고등학생 나이가 돼야 사춘기를 비로소 겪곤 했었는데 나는 그 사춘기 시절의 거의 전부를 이촌동 복지 아파트에서 보냈던 셈이.


소중한 사춘기 시 동안 너무도 많은 것들을 느끼고 또 경험하며 하루하루 조금씩 나는 성장했었 것이다. 지만 역시 세월이 무서운 것인지 4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버린 이제는  시절 기억 거의 대부분을 그 기간에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까맣게 어버렸.


그럼에도 다행히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기억들이  가지가 있다. 래와 같은 기억들이다....



때로는 정말 민망한 '복지' 아파트 이름


번째는 이 아파트의 이름에 관련된 것이다. 아파트 입구 벽에는 '복지 아파트'라고 적힌 금속 팻말이 붙어 있었는데 바로 이 팻말과 관련된 것이었다.


사실 '복지' 아파트라고 적혀 있던 그 팻말은 별다른 문제나 이슈 거리가 되지 않았다. 그저 너무 평범하고 흔한 아파트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평범한 이름에서 받침이 딱 하나만 빠져도 이 아파트 이름은 곧바로 큰 이슈 거리가 될 수 있었다. 동네 못된 아이들이 너무도 자주 '복'이라는 첫 글자에서 받침을 떼내는 만행을 저지르곤 했던 것이었다.


생각해 보시라, 복지에서 앞부분의 ㄱ이 없어지면 'O지'란 민망한 단어가 되는데 이촌동 동네 한복판 O지 아파트란 이름이 버젓이 표기되어 있는 아파트가 존재하고 는 것을 얼마나 황당하고 민망했겠는가....


사진) 과거 복지아파트 입구가 있던 공간. 이 공간의 벽면에 복지아파트란 문구가 새겨져 있는 팻말이 있었다.


지나고 보니 좀 우스운 이야기 같이 들리기도 하지만 사실 시절 복지 아파트 주민들은 반복되는 이 문제를 나름 꽤 큰 골칫거리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수리해 놓아도 곧바로 며칠 만에 귀신 같이 또다시 어김없이 받침이 떨어져 있곤 하던 상태가 반복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검색하다 보니 이촌동 복지 아파트는 아닌데, 역시 동일한 이름을 가진 다른 지역의 아파트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는 우스개 소리 같은 내용이 있어 해당 글을 참고로 링크한다. 


(2000년대 초 복지 아파트 사건?)

https://m.blog.daum.net/donggoomung/12649256


링크 속 이야기의 실화 여부는 잘 판단이 안되지만 어쨌든 지도에서 검색해 보면 요즘도 '복지'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아파트가 전국에 꽤 많은데, 그 많은 아파트 주민들 모두가 이촌동 복지 아파트나 위 링크 속의 아파트 사례와 유사한 시련을 지금도 여전히 겪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70년대 신문사 기자님


 번째는 70년대 당시 기자님들대단했던 권세를 복지 아파트 단지에서 직접 체험했던 기억이다. 어느 날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어떤 사람이 자신이 기자라면서 질문 몇 가지를 하겠다며 접근해 왔다. 지만 학생이었던 내가 어른들 일에 답을 하기는 다소 적절하지 않은  같아서 잘 모르겠다고 답을 하고 그 자리를 피했다. 이후에 그 기자는 주변을 지나가던 다른 주민에게 다시 한번 같은 질문  시도했는데 그 주민 역시 모른다고 답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그렇게 번번이 인터뷰에 실패하는 것이 서너 번 더 연이어지 기자는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내가 OO신문 기자인데  무시해? 어디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겠어...."  아파트 단지 한복판에 서갑자기 흥분을 하고 고성을 지르던 모습을  기억이 있다.


백주 대낮에 지나가는 주민들 모두를 대상으로 엄포를 놓는 그런 기자를 보고서 그리고 지나가던 주민들 아무도 그에게 반박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서 당시 10대의 중학생이었던 나는 기자라는 직업이 정말 대단한 권력을 가진 직업이라는 사실,  학교에서는 결코 배우지 못했 사실을 그날 처음 깨우칠 수 있었다. 물론 오래전 70년대에 발생했던 일이고 요즘에는 이런 기자님은 전혀 보기 어려울 것이다.


어쨌든 70년대나 요즘이나 '언론 고시'라는 단어가 존재할 정도로 언론사 취업이 어렵다 하니 시대와 관계없이 기자란 직업이 나름 자부심을 가질만한 직업인 것만은 인정해야 할 사실인 것 같다. 다만 모든 인간에게 개인 차가 있는 것처럼 어렵게 선발된 기자분들도 성향에 있어서 개인 가 분명히 있었것인데 그중에는 여기서 사례로 들었던 분처럼 조금 문제가 있는 기자도 있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사실 나도 20대 시절 대기업에 취직해서 신입 사원으로 이미 근무를 하고 있었지만 중도에 언론사 시험을 봐서 기자로 직업을 변경하는 것을 고려해 보기도 했었다. 왜냐하면 기자가 너무도 멋져 보였고 또 낭만적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기자 시험이 워낙에 어렵다고 하는데 당시 대기업 신입 사원 신분에 낮에는 말단 사원으로 잡일 처리하느라 바쁘고 저녁에는 낮 동안 쌓였던 온갖 스트레스 풀기 위해 술 한잔 필히 하느라 바빠서 그렇게 어려운 시험 준비할 시간을 좀처럼 마련할 수 없었 결국 직업 변경을 해보겠다는 생각은 포기하 말았다.


내 인생 20대, 즉 아직까지는 눈앞에 선택할 수 있는 미지의 직업들이 너무도 많았던 득한 과거 시절의 기억이다....



서문 여고 초등학교 동창


같은 복지 아파트 옆 동에 살던 예쁜 여고생이 하나 있었다. 교복으로 볼 때 그녀는 서문여고 학생이었는데 등교 시간이 같아서 그런지 아침 등교할 때는 거의 매일 아파트 출입구 앞에서 마주치곤 했었다.


게다가 당시 이촌동에는 한강을 건너가는 버스가 없었던  그녀나 나나 둘 다 현재 용산 LG 유플러스 근처에 있던 버스 정류장까지 약 15분 정도 걸어가서 그곳에서 한강을 건너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타야만 다. 결국 거의 매일 아침 복지 아파트 입구에서 그녀와 조우해서 대략 15분 정도는 함께 나란히 같은 방향으로 길을 걸어야 했던 셈이었다.


그런데 사실 그녀는 내가 전혀 모르여학생은 아니었다. 그녀는 바로 내 신용산 초등학교 동창으로 비록 그렇게 잘 알던 친한 친구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서로 간에 알고 있던 사이였다.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을 한다면 초등학생 시절 나는 성적도 좋았고, 반장도 하는 등 나름 어느 정도 두각을 나타냈다고 할 수 있었던 반면, 유난히 작았던 그녀는 성적, 외모 등 어느 면에서 보나 도무지 눈에 띄지 않았던 너무도 조용한 학생이었다. 그러다 보니 서로 간에 접점이 없었고 결국 동창이긴 지만 초등학교 시절에도 이미 매우 소원한 사이였


그런데 학교 성적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찌 된 일인지 고등학생이 된 그녀의 외모는 과거 초등학교 시절과 비교해서 너무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분명 같은 사람이긴 한데 엄청 예쁜 여고생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도 희미하게 기억이 나지만 당시 서문여고 교복이 일반 고등학생 교복과 좀 다른 디자인이었는데, 그녀에게 너무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시절 대비 키가 엄청나게 커졌고 몸매도 정말 날씬하게 변했는데, 이런 그녀의 외적 조건과 당시 서문여고 교복이 너무도 잘 어울렸던 것이었


(70년대 서문여고 소개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s5we&logNo=221563794340


그런 그녀를 매일 보면서 언젠가 꼭 한 번은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사실 초등학교 동창이니 나름 말을 걸 구실도 어느 정도는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애당초 초등학교 시절에도 한 번도 서로 대화를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의외로 그런 기회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또 어쩌다 눈이 마주치기도 했는데 웃는 것인지, 혹은 비웃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묘한 그녀의 미소와 시선 때문에 그런 시도를 해보는 것이 더욱 망설여지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녀와의 매일 아침 15분 동행길은 갑자기 끝이 나고 말았다. 이사를 간 건지 아침 등굣길에 그녀를 더 이상 볼 수 없는 날이 지속되었것이었다.


결국 70년대 복지 아파트에 살았사춘기 10대 남학생이 품었던 연민의 감정은 그렇게 허망한 결말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이후 50년이 다 되도 오늘까지 두 번 다시 그녀를 적이 없다.... 인생이란 그렇게 한번 흘러가버리면 그저 그렇게 그저 끝인 것이다....



10대 인생 처음 만난 형사


 번째는 고등학교 집에 들어가려다 겪었던 일이다. 여느 날처럼 학교에서 돌아와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부터 끔힐끔 나를 쳐다보며 따라오던 어떤 어른 2명이 갑자기 집 현관문 앞에서 나를 잡아 세웠다.


그리고는 대뜸 내 동생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묻는 말투가 꽤 험했고, 분위기가 험악해서 유독 더 그렇게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인상도 보통 사람과 달리 매우 무서워 보였다.


이후 알고 보니  두 사람은 형사와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어떤 학생의 아버지였는데, 내 친동생이 이촌동의 불량배로 그분의 아들을 심하게 폭행을 했고 래서 조사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난 어이없기도 하고 또 많이 놀라기도 했는데 어쨌든 실제 당시 동생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모른다고만 답을 했다. 그런데 형사란 사람이 나를 보고 또 한동안 나와 이런저런 대화를 해보더니 갑자기 가해자를 잘못 본 것 같다고 다시 확인해 보자고 피해자 아버지에게 말을 했다.


형사는 폭력배로 의심되는 학생의 형이란 사람을 보고 직접 얘기까지 해보니 그런 불량배가 있을 집안이 아닐 것이라나름대로의 판단이 섰 같았다. 물론 실제 친형제라도 동생과 형의 성격과 행동이 완전히 다를 수 있고 그러한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형사는 어떠한 기준으로 판단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를 보고서 내 동생이 가해자가 아닐 것이라는 것을 나름 단정적으로 판단했던 것이었다. 영화에서 흔히 보는 형사의 '촉'이었는지....


실제로 나나 동생이나 누군가에게 과감 폭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과격하거나, 용감하지는 못한 이었다. 물론 유약해 보이는 나와는 다르게, 동생은 덩치도 크고 인상 역시 우락부락해 보였다. 그렇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마음이 너무 약해서 어릴 시절 반항도 하지 못하 나한테 항상 맞고만 자란 순둥이였다.


지만 그 피해자 학생의 부친이라는 사람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나중에 집에 돌아온 동생은 그 부친이 요구하고 떠난 대로 이촌동 파출소에까지 가서 그들을 다시 만나야만 했고 가해자가 아니라는 확인을 받아야만 했다.


결과적으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끝난 해프닝이었지만 그날 10대의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험악한 말투와 인상을 가진 형사님에게 취조 아닌 취조를 당했었 사실이 워낙에 놀랐던 이었는지 지금도 그때 일이 기억에 생생하다. 


나쁜 사람들 잡기 위해 형사님들 고생하시긴 하지만 어쨌든 남은 인생에서 또 형사님과 조우할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회장님의 숨겨진 아들 


마지막은 우리가 살던 복지 파트 바로 옆에 정우맨션이란 면적이 100평 정도 되는 꽤 큰 평수의 아파트가 있었는데, 바로 이 아파트에 살았한국 모 재벌기업 회장의 아들과 관련된 얘기다.


그분 아들이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된 이유 단순한데, 비록 반도 다르고 서로 하게 알고 지내 사이 역시 전혀 아니었지만 어쨌든  회장님 아들이 나와 같은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같은 학년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그 아이와  중학교 동창이었던 셈인데 학교에서 이미 그 아이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으니 나도 그런 소문을 듣고 그 아이의 신분에 대해 알게 되었던 것이었다. 사실  회장님은 내 동창 위로 이미 아들 많았던 분이셨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마지막 아들로  동창까지 얻게 됐다고 들었다.


(106평 정우 맨션 내부 모습)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luxurynhouse&logNo=221186964315


요즘에도 재벌집 아들이라면 다소 색안경을 쓰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인데, 70년대는 요즘보다 더 해서 재벌가 아들이 우리들의 동창이라는 것이 사실 좀 신기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리고  당시 분위기가 그렇다 보니 회장님 아들은 비록 같은 동네에 살고 또 같은 학교 동창이었지만 솔직히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그 동창이 사는 아파트가 내가 살았던 아파트의 3배가 넘는 엄청난 면적의 아파트였으니 그러한 거리감이  강했던 것 같다.


한편 그 회장님의 자녀 관련 언론 기사를 보면 내 친구였던 이 중학생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언급이 없었는아마도 혼외 아들로 법적으로는 아들 인정을 못 받았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엄마와 아들 단 둘이서 100평 정도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 만큼 그 회장님으로부터 엄청난 경제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으니 생활에 아무런 아쉬움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엄청난 경제적인 지원으로 보였지만 그 회장님께는 전혀 그렇게 부담스러운 지원액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친구 인상이 아버님인 회장님을 너무 많이 닮아서, 우리 동창 중 누구도 그 아이가 그 회장님 아들이라는 사실은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가지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너무 고생하며 자수성가하신 회장님은 신문이나 방송에 나오는 모습을 보면 피부색이 매우 짙은색이었던 반면 전혀 고생을  했을 그분 아들의 피부색은 그와 반대로 지나칠 정도로 너무도 하얗다는 이었.


50여 년 가까이 세월이 흘러버린 요즘도 정우맨션 주변을 걷다 보면 회장님의 숨겨진 아들이며 내 동창인 그 친구가 문뜩 떠오르곤 한다. 그런데 유독 하얀 피부에 고급스러운 멋진 차를 타고 등하교하던 그 부자 친구도 세월이 흘러서 이제는 나처럼 쭈글쭈글한 피부를 가진 노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만 보면 세월이란 잣대는 빈부차 없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것 같다....


우맨션은 1972년에 완공된 아파트인데 2022현재도 그대로 남아있고 사람들이 여전히 거주하고 있다. 바로 옆 내가 살던 복지 아파트가 90년대 말 사라져 버린 것과 달리 50년째,  반백 년 동안 이촌동의 터줏대감 같은 아파트로 남아있는 이다.


사진) 정우맨션 모습. 사진의 왼쪽 옆에 있는 아파트가 동부 센트레빌 아파트인데 70년대에는 5층짜리 복지 아파트가 이곳에 있었다. 내가 살던 집도 정우맨션 바로 옆에 있는 저 건물 자리에 있었다.


사진) 우맨션 입구 모습. 1970년대에는 이 입구가 호텔 로비처럼 엄청나게 크고 으리으리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그렇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낡아 그런지 이제는  이상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 것 같다. (2022. 4월)


사진) 정우맨션의 벚꽃 나무. 이촌동에서 나름 큰 벚꽃 나무 중 하나일 것 같은데, 매년 봄 너무도 멋진 꽃을 보여준다. 가운데 노란 개나리도 살짝 보인다. (2020. 3월)


사진)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정우맨션의 오래된 담장 모습. 이촌동에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멋을 더해주는 그런 담장인 것 같다. (2020. 9월)

이전 08화 이촌동 연가 (8)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