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LT May 01. 2022

이촌동 연가 (10)

■   이촌동 동네 입구 한 동짜리 제일 맨션

복지 아파트에 살다가 79년 인근에 있는 제일 맨션이라는 9층, 한 동짜리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70년 이촌동으로 이사 와서 1) 공무원 아파트, 2) 한강 맨션, 3) 한신 맨션, 4) 복지 아파트에 이어 거주했던 5번째 이촌동 아파트였다.


이 아파트는 세대 수가 불과 24 세대로써 74년 완공된 인근 노들 맨션(18 세대) 코스모스 맨션(30 세대) 등 함께 아마도 이촌동에서 가장 적은 세대수를 갖고 있는 아파트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처럼 달랑 건물 한 동에 세대수까지  적어 그런지 요즘도 동네걸으면서 이촌동 큰 길가에 홀로 서있는  아파트를 게 되면 과거 이곳에 살던 시절 기억도 어렴풋이 나지만 왠지 유독 썰렁하고 외로워 보이는 것 같기도 다....


사진) 제일 맨션. 이촌동 동네 입구 있는 아파트다.


제일 맨션은 76년에 완공된 아파트로서 현재 시점 2022년 기준으로는 46년 정도나 된 나름 오래된 아파트지만 우리 가족이 이사 가던 79년 기준으로는 완공된 지 채 3년밖에 안된 새 아파트였다.


또 이 아파트는 그 면적이 약 40평으로 26평 정도였던 복지 아파트보다는 훨씬 넓었는데 주민 등본을 보면 1980년대 중반까지 최소 5년 이상 이 집에서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역시 세월이 너무도 많이 흘러 그런지 이제 이 집 내부 구조조차도 전혀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그 내부 구조를 찾아보려 인터넷에서 검색까지  봤지만 세대수가 너무도 적어서인인터넷에서도 아파트 내부 평면도는 찾을 수가 없었다.


거의 성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대학 시절을 포함해서 5년이 넘도록 살았던 집이었음에도 내부 구조도 전혀 기억을 하지  하고 있으니 사람이 살아온 과거 세월이 참 허망하기만 한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 인생 시간이 이미 그토록 많이 흘러버렸다는 서글픈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약 5년 간 파트살면서 겪었던 오래전 70~80년대 기억들도 그렇게 거의 대부분을 이미 잃어버렸다. 그렇지만 그래 지금까지 남아있 기억이 가지 있다.



지하 고깃집과 


첫째는 요즘은 필라테스 시설로 운영되는 인데 과거 한때 식당이었 이 아파트 지하실에 대한 기억이다. 이 식당에 대해서는 식당 음식과 그 맛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는 반면, 식당의 냄새와 관련된 뚜렷하게 남아있다.


이 식당은 불고기 등 여러 고기 음식을 파는 식당이었는데, 고기 굽는 냄새가 아파트 위층에 모조리 전달되어 1~2층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8층에 있던 우리 집에까지 그 냄새가 그대로 올라오곤 했었다. 그러다 보니 이 냄새 문제에 대한 아파트 전체 주민들의 불만이 꽤 심했다.


솔직히  내 경우는 그 냄새가 그렇게 자극적이라고는 느끼지를 못했다. 그렇지만 부모님 포함 아파트에 거주하던 다수의 주민들이 그런 불만을 갖고 다는 것만 부모님을 통해서 익히 전해 듣고 있었고, 이 문제로 아파트 주민들과 식당 사이에 몇 차례 다툼이 있었던 것도 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주민들이 갖고 있던 심각한 불만은 식당 고기 냄새 자체보다는 그 냄새인해서 주변에서부터 제일 맨션으로 몰려드는 쥐들에 대한 불만이었다. 그 고깃집으로 인해 인근 이촌동 다른 아파트들 대비 제일 맨션에만 유독 쥐들이 많이 꼬인다는 다. 


그리고 결국 입주민들의 반복되는 이런 불만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본적으로 장사가 잘 안 됐던 이유에서였는지 오래 지나지 않아  고깃집은 폐업했고 이후 그 공간은 식당이 아닌 다른 상업용 업체들만 입주했었다. 아마도 입주민들이 지하에 식당이 다시 들어오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그렇지만 사실 이촌동 주변을 돌아봐도 한강 맨션이나 현대 아파트처럼 아파트 건물 저층에 불고기 집과 같은 식당들들어서 있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은데 제일 맨션 경우만 식당으로 인해 발생하는 쥐 문제가 유독 더 심각했었는지는 사실 모르겠다. 어쩌면 시절이 서울의 도심에도 쥐가 워낙에 많았던 시절이라서 아파트 입주민들이  문제에  더 민감했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요즘도 쥐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70~80년대까지만 해도 시골은 말할 것도 없고 이촌동에도 쥐가 정말 많았다. 한마디로  시절은 이촌동 그 많은 아파트 거의 전부에서 쥐들이 천장에서 뛰어다니는 소리가 가득했던 시절이었던 이다. 


(70~80년대 쥐잡기 운동)

https://theme.archives.go.kr//next/koreaOfRecord/grapMouse.do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요즘에는 쥐 소리는 거의 들을  없는 반면 위층 입주민의 발 망치 등 전혀 다른 형태의 층간 소음으로 시달려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그런 차이가 는지 정확히 모르겠, 나 역시 그 이유가 궁금하지만 90년대 이후 건축된 아파트와는 다르게 60~70년대 완공된 제일 맨션, 공무원 아파트, 민영 아파트 등  이촌동 아파트에는 쥐 소리는 들렸지만 발 망치와 같은 그런 층간 소음은 정말로 들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런 층간 소음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된 것은 90년대 완공된 새로운 아파트들이 들어선 이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60~70년대 완공된 아파트들은 서울에서 아파트가 처음으로 건설되던 초창기라 설계와 건축 모두 원칙대로만 탄탄하게 진행됐기 때문 아니었을지.... 


층간 소음으로만 보면 요즘과 달리 과거 그 시절은 참으로 행복한 시절이었던 것 같다....



백주 대낮의 깔끔한 결투


두 번째는 제일 맨션 8층 방에서 뒤편 창밖을 내려다보다가 우연히 보게  장면인데 우리 아파트 바로 뒤의 코스모스 아파트 경비원 분과 배달하시는 분 간의 1분도 안 되는 짧은 맨주먹싸움이었다.


요즘은 경비원 분들이 연세가  있으시지만, 70~80년대 그 당시는 젊은 분들도  있었던 것 같다. 코스모스 아파트 경우도 그런 경우였는데 배달하시는 분이 아파트 입구에서 들어가려는 순간에 경비하시는 분이 제재를 했고 이후 매우 짧은 대화가 한두 마디 오고 가더니 바로 더 이상의 대화 없이 상호 간에 주먹이 오고 가는 난타전이 이어졌다.


사진) 코스모스 아파트 모습. 마산 아귀찜이라고 적혀있는 간판 바로 아래에서 두 사람 간 주먹싸움이 벌어졌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경비 인력이 배달 인력 주먹에 맞아서 바닥으로 주저앉게 되는 장면이 연출됐고 이후  사람은  이상의 교전 없이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기존에 하던 자신의 일을 조용히 다시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 싸움은 어찌 보면 좀 싱거울 정도로 짧게 끝났는데 너무 깔끔하게 싸움이 끝나서 나는 당시 이촌동 지역 '경비와 배달' 업계는 나름대로 상호 간 합의되고 정해진 어떤 교전 규칙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요즘 이촌동에서는 좀처럼 보기가 어려운 70~80년대 백주 대낮 이촌동에서의 깔끔한 맨주먹싸움 대한 기억이다



외삼촌의 마지막 말씀


세 번째는 제일 맨션으로 어느 날 찾아왔던 외삼촌에 대한 기억이다. 이 외삼 비록 사정이 있어 졸업은 못했지만 1950년대에 서울대에 한때 다녔을 정도로 인텔리셨고,  머리도 그만큼 좋으셨다고 한다. 지만 머리가 지나치게 총명한 들이 정신 질환에는 오히려 더 취약하다는 분석이 사실인지 여덟 분이나 되는 외삼중에 유일하게 정신병 앓고 계시 분이셨다.


전혀 멀쩡하셨던 분이 40대가 넘어서 그런 질환이 갑자기 생기셨는데, 때문에 이 외삼촌은 때로는 매우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기도 하셨고  시절 아직은 어렸던 내게는 그러한 언행을 보이는 외삼촌이 사실  무섭기도 했었다.


그런데 하필 부모님이 모두 집에 안 계시던 어느 날 대낮에 나와 동생 둘만 집에 있는데 외삼촌이 집으로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때 무서워서 문을  말까 잠시 망설이다 결국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을 조금만 열고 부모님께서 안 계신다고 했더니 외삼촌은  들어오려고 하지도 않고 바로 간다하셨다. 집 안으로 들어와서 부모님을 기다리겠다고 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 형제가 공포에 휩싸인 눈망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잔뜩 경계하고 있으니 그런 을 하기가 나름 부담스러워 바로 발길을 돌리시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등을 돌려 돌아가시기 직전에 외삼촌은 나를 보고서 "철영아, 내가 이상한 행동 한 것 전혀 없다. 그렇지?'라며 본인이 취하셨던 행동을 한 번  다짐하고 확인하는 말씀을 하셨다. 


한편 말씀을 하시던 그 순간만은 외삼촌은 아무런 정신 질환이 없는 완전히 멀쩡하던 과거의 외삼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외삼촌이 자신의 언행에  부담감을 갖고 어린 조카로부터 확인까지 받으려 했던 모습이 마음에 나름 걸렸다. 


나는 외삼촌의 그 말에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고, 외삼촌은 내 답과는 관계없이 등을 돌려서 아파트 긴 복도를 되돌아 터벅터벅 걸어가셨는데 뭔가 좀 많이 미안했던 나와 동생은 그렇게 떠나시외삼촌 뒷모습만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이 외삼촌친척들과 연락이 완전히 끊겼고 아마도 서울 어딘가를 혼자서 배회하시다가 사망했을 것이라고 어르신들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실제 이후 40년이 다 되도록 우리 친척 누구도 이 외삼촌과 연락이 되셨던 분은 없었다. 그처럼 총명하셨다는 외삼촌은 그렇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먼저 멀리 떠나가셨던 것이다.


결국 생각해보니 제일 맨션에서 헤어지면서 하신 그 말씀, 즉 "철영아 내가 이상한 행동 한 것 전혀 없다 그렇지?"라는 확인하는 듯한  말씀이 그분이 아직 이 땅에 살아계시던 시절 내가 들은 그분의 마지막 말씀이었던 셈이다. 


나도 언젠가 이 땅을 떠날 텐데, 새로운 세상에서 먼저 떠난 외삼촌을 다시 만나게 되 무엇보다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그때는 정말 미안했었다는 말부터 하고 싶다...


사진) 외삼촌(앉아계신 분)이 정신 질환이 전혀 없던 시절 군 복무할 때 면회 온 누님(내 어머님)과 함께 찍은 50년대 말 사진. 이 외삼촌 사진은 이렇게 오래된 사진밖에 없다....



귀소 본능


네 번째는 신입생 환영회 때인가 대학생 시절 술을 너무도 많이 마신 후에 거의 실신한 상태로 집에 오다 아파트 현관 출입구에서 졸도한 사건이다.


아무리 취했어도 소위 말하는 귀소 본능이 작동했던 것인지 집이 있는 아파트까지는 정말 악착 같이 찾아왔는데 마침내 보이니 집도착했다고 안심이  그랬는지 아파트 출입구에서 그대로 졸도했던 것이었다. 당시 경비 아저씨가 막 깨우곤 기억은 지금도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데  이상의 자세한 기억은 전혀 없다. 


사진) 70년대 말 내가 쓰러져 있던 장소. 제일 맨션이라고 적혀 있는 문구 바로 아래에 쓰러져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아파트 출입구 현관 앞에서 땅바닥에 그대로 쓰러졌음에도 어디 하나 깨지거나 다친 곳은 전혀 없었다. 아마도 아직은 건강한 몸으로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이후에도 술을 즐겨 마시긴 했지만 그렇게 떡이 되도록 술을 마시고 집 앞에서 실신했던 때가 처음이자 또 마지막이었다. 


한편 꾸준하게 술을 마시는 것이, 어쩌다 번의 폭음보다 오히려 훨씬 나쁘다고 하는데 내 경우 불행하게도 과거에는 이날처럼 어쩌다 폭음하던 습관에서 언젠가부터 정확하게 일정량만을 꾸준하게 마시는 으로 음주 습관이 바뀌었고 아직도 그 나쁜 습관이 유지되고 있다.


담배는 13년 전 동생이 뇌출혈로 갑자기 이 세상떠났을 한 방에 끊고 이제는 전혀 생각조차 나지 않으니 확실히 끊은 것 같다. 술도 그렇게 끊고 싶은데 정말 잘 안된다.... 적어도 내게는 '금주''금연'보다 정말  힘든 것 같다....


하긴 생각해보면 단 한 번도 과음하지 않고 매일 일정량을 그것도 오직 저녁에만 꾸준하게 반주로 드셨던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2~3일 전 동대문 이대 부속병원에 누워계실  창밖 동대문 거리를 바라보시면서 하셨던 말씀이 "동대문에 러시아 술을 팔던 식당이 이 병원 근처있었는데, 오래 젊은 시절 그 술 마시던 생각이 참으로 그립구나"였다, 그때 아버님은 이미 당신 임종이 가까웠던 어려운 상황이란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계셨는데도 그러한 말씀을 하실 정도로 술 생각이 간절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바로 그분의 친 아들인지라....


어쨌든 그리고 며칠 뒤에 일제 강점기 1925년부터 시작된 76년 땅에서의 란만장한 시간들을 아버님은 조용히 마감하셨다....



제일 맨션 옥상에서의 마지막 술....


다섯 번째는  섬뜩한 사건이지만 초등학교 동창생자살 기도 사건이다. 우리가 대학생 시절이던 어느 날 그 동창이 너무 괴롭다며 술 한잔 마시자 해서 제일 맨션 우리 집에서 함께 술을 마셨다. 그런술을 이미 너무 많이 마셨음에도 그 친구가 굳이 더 마시자고 우겨서 결국 아버님께서 식탁 옆에 진열해 놓으셨던 독한 양주 중에 병을 몰래 빼내어 들고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서 술을 마셨다.


그리 술이 본격적으로 더 들어가마침내 친구가 그렇게 괴롭다고 하소연하는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은 놀랍게도 아버님, 어머님으로만 알고 있었분들이 알고 보니 사실 큰 아버지와 큰 어머님이셨다는 것이었다. 친 어머님은 내 친구를 낳으신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병으로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님은 병으로 돌아가신 어머님이 너무도 보고 싶다며 곧이어 자살을 하셨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내 친구는 큰 아버님, 큰 어머님께서 키우셨는데 그간 이러한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으셨던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서 나도 당연정말 놀랐는데 나보다 훨씬 더 놀랐을  친구는 그런 아버님에게 몇 가지 질문들을 하위해서 자신도 똑같이 자살해서 아버님이 계신 그 세상으로 가겠다고 우기시작했다. 그 친구 표정을 보니 이미 그런 작정을 하고서 그날  세상에서의 마지막 술을 마시는  같았다.


아버님이 어머님을 너무 사랑해서 그런 결정을 하신 것은 한편으로는 이해하겠는데 그럼 남겨진 자식은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왜 전혀 아무 답도 주지 않고 그런 결정을 내렸는 이해가 안 되고 그 이유를 반드시 저승에 찾아가서 아버님께 따져 보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 친구는 그날 우리 집과 옥상에서 정말 많은 술을 마셨고 집에 가서 혼자 또 더 마셨다 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자살하기 위해서 수면제까지도 결국 대량으로 복용했는데 의외로 이런 모든 행위들의 결과 그는 죽지 않고 마치 전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나중에 이유를 들어 보니, 그날 그 친구가 술을 너무도 많이 마셔서 어느 순간 실신했고 그런 상태에서 자신도 인지하지 못했던 사이에 그동안 먹은 것들을 모두 토해버렸는데 그때 복용했던 다량의 수면제 성분이 동시에 배출되었기 때문에 살았다고 했다. 너무 많이 마신 술이 오히려  친구 목숨을 건진 것이었고 그 덕에 그날 제일 맨션 옥상에서 마셨던 그 많은 술이 이 친구의 이승에서의 마지막 술이 되지 않았던 이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에 친구를 보면 한때 자살을 시도했던 사람이라고는 전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너무나도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서, 결혼 후 아이들 다 키워 시집과 장가보내고 지금도 아주 잘 살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 그 친구가 정말 자살을 시도했던 바로 친구가 맞는지 의아스럽기도 했다.


한편  이야기를 언젠가 어머님께 말씀드렸더니 1931년 태어나신 어머님 말씀이 본인도 그 사건을 알고 계시며, 그 부부의 애절한 '러브스토리' 그 시절을  서울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하셨다. 


다만 자살을 시도한 내 친구가 바로  유명한 러브스토리 주인공분의 아들이었다는 것은 전혀 모르셨다 하시며 그 친구가 그분들 아들이었다는 사실에 몹시 놀라기도 하셨다. 정말 엄청난 세상 이야기는 그렇게 대를 이어 우연히 다시 접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저승에 아버님이 계시다고 믿고 그곳으로 가서 따지겠다고 말한 내 친구 주장대로라면, 내 친구도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서 자연스럽게 저 세상에서 아버님을 다시 만날 텐데, 이촌동 제일 맨션에서 나와 만났던 그날 20대 초 나이에 왜 그리도 급하게 서둘러 아버님을 만나려고 했을지....


어느 유명 연예인 어머님 깊은 믿음처럼 조만간 모두 다시 만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다시 만날 테니 유언 필요 없다)

http://m.stoo.com/article.php?aid=5352909424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