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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T May 15. 2022

이촌동 연가 (12)

■ 한강 바로 앞 5층 한 동짜리 청탑 아파트 - 2/2

80청탑 아파트에서는 10년 넘나름 오랜 기간 거주했었 30대 후반의 나이가 될 때까지 거주했었기 때문인지 꽤 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아파트에 살던 시절 겪은 일들에 대한 기억들은 이전에 거주했던 이촌동 5개 아파트 경우보다는 좀 더 많이 남아있는 것 같다.



모조리 기증


언급한 바와 같이 바로 옆에 있던 다섯 동짜리 한신 아파트와 공동으로 재건축 사업이 진행되면서 한 동짜리 청탑 아파트는 90년대 말 허물어졌고, 그 자리에는 2002년 '삼성 리버 스위트'라는 여섯 동의 고급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때 과거 한강이 보이던 자리에 거주하고 있던 청탑 아파트 주민들은 리버 스위트에서도 역시 한강이 보이는 한강 바로 앞 동을 배정받게 되었는데, 이 새 아파트는 청탑 아파트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그 가격이 올라 있었다.


기존 청탑 아파트는 허름하고 좁은 평수였던 반면, 재건축 덕분에 청탑 아파트는 면적 50평이 넘는 호화, 고급 아파트로 변신을 하게 됐고, 게다가 한강도 바로 내려다보인다는 장점까지 가지고 있어서 가격이 그처럼 크게 오르게 되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재건축 이후 청탑 아파트 주민들은 모두 엄청난 시세 차익을 누렸다.


하지만 역시 청탑 아파트에 살았던 우리 가족은 이러한 시세 차익을 단 한 푼도 누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2001년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직후에 당시 재건축이 한참 진행 중이던 청탑 아파트를 어머님께서 고스란히, 통째로, 전부 어느 종교 단체에 기증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실 그때 당시 어머님께서 기증하셨던 것은 이 아파트뿐만이 아니었다. 이촌동 명지 상가에 있던 점포, 강남 아파트, 마포 아파트와 오피스텔, 경기도 용인과 강원도의 부동산 등등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평생 모으신 재산 중 동생의 법적 상속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부를 기증하셨다. 물론 나는 내 몫의 상속분을 이렇게 기증하는 것에 전혀 동의할 의사가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기증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모든 기증이 완료된 시점이었다.


한편 기증에 대한 아버님의 유언이 있으셨던 것도 아닌 실정에서, 어머님께서 당시 나와 누님의 동의 전혀 없이 유산 대부분을 기증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의외로 꽤 간단했다. 동생 것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의 인감 모두를 어머님께서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어머님 인감이야 당연히 어머님께서 보관하고 계셨고, 조현병으로 시달리고 있던 누님 인감도 어머님께서 관리하셨을 뿐 아니라, 당시 해외 법인 주재원으로 회사의 캐나다 법인에 파견 나가 있던 나 역시 출국 시 인감을 부모님께 맡기고 출국했었던 것이었다. 결국 동생을 제외한 가족 모두의 인감을 어머님께서 갖고 계셨던 것인데 어머님께서는 이 인감들을 아버님 유산의 상속 및 기증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활용하셨던 것이었다.


당시 어머님께서 기증하신 아버님 유산들은 2001년 그 당시 화폐 가치 기준으로도 이미 수십 억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따라서 20년도 더 넘게 세월이 흐른 요즘 그 부동산들의 현재 화폐 가치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시 기증한 명지 상가의 작은 점포 하나만도 지금 내가 거주하고 있는 이촌동 아파트보다도 더 비싸다.


그런데 내가 받을 상속분 포함 아버님 유산의 거의 전부가 기증되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나는 그다지 오래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저 어머님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한국이 정말로 가난하고 어렵던 시절, 나를 길러주셨고, 대학까지 보내주셨을 뿐 아니라, 또 생각해 보면 부모님 재산 형성에 내가 기여했던 것도 사실 전혀 없었던 바, 상속법 내용 여부를 떠나서 부모님께서 평생 모으신 그 재산을 부모님 뜻대로 처분하는 것에 대해 내가 주장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이러한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동생은 좀 달랐다. 그는 자신의 법적 상속분은 모두 받았으므로 특별히 이견을 제시하기는 어려웠지만, 어쨌든 아버님 유산과 어머님 재산 거의 전부가 기증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심지어 그는 청탑 아파트 재건축 이후 입주하기로 되어 있던 삼성 리버 스위트 아파트가 고스란히 기증되어 버린 것이 너무도 화가 나서 이촌동에 들어오고 나갈 때는 그 아파트가 보이는 길은 의도적으로 피한다고까지 말하곤 할 정도였다.


하지만 세상 일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 그랬던 동생도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불과 8년 만인 2009년 46살의 아직 한참 나이에 뇌출혈로 갑자기 이 세상을 떠났다. 물론 떠날 때 당연히 전혀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했다. "공수래공수거"라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경우처럼 빈 손으로 와서, 이 세상에서 잠시 가졌던 것들 모두 이 세상에 고스란히 남겨두고 빈 손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나 역시 그럴 수밖에 없을 것처럼 말이다....


한강이 온전히 내려다보이던 이촌동의 청탑 아파트는 이후 재건축이 완공됐고, 우리 가족들이 살아야 할 자리에는 우리 가족과 전혀 관계없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원래 그 공간에 살던 5명의 우리 가족은 아버님은 2001년, 동생은 2009년에 이 세상을 떠났고, 누님은 40년 가까이 조현병으로 시달리는 인생을 살고 있으며, 올해로 92세가 되신 어머님은 그렇게 전 재산을 기증하신 후에 태어나신 고향 서울을 떠나서 경상북도 문경 산골의 방 2개짜리 10여 평 남짓한 허름한 집에서 20년 이상 시골 할머니로 살고 계신다.


사진) 어머님께서 거주하시고 계신 문경 산골의 주택. 전 재산을 기증하신 후 이곳에서 이혼당한 누님과 함께 사신다.


그리고 나는 과거 청탑 아파트가 있던 위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같은 이촌동 같은 지역 내의 또 다른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80~90년대 살았던 우리 가족들의 기억이 아직 어딘가에 조금은 남아있을 청탑 아파트 자리를 산책할 때 가끔 바라보면서 과거를 회상하며 남은 인생을 살고 있다.... 청탑 아파트에 살던 우리 가족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사진) 한강 공원에서 찍은 삼성 리버 스위트 아파트. 바로 이곳에 90년대 말까지 '청탑 아파트'가 있었다. 



개미 죽이기


청탑에 살던 20대 시절 어느 날 정말로 어쩌다 죽음에 대해 나름 좀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시 청탑 아파트 베란다에는 아버님께서 관리하시던 다양한 화분들이 여러 개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그 화분에 물을 주고 있을 때, 마침 개미 여러 마리가 화분 위로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때 나는 무심결에 그중의 한 마리를 모종삽으로 찔러 죽였다. 그 여러 개미 중 특별히 그 개미만 유독 싫었던 것도 결코 아니었고, 모두 똑같이 보이는 개미 중에 유난히 그 개미만 달라 보였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 개미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을 뿐이고 그것이 그 개미를 선택해 죽였던 유일한 이유였다.


하지만 그 개미를 죽인 이후 나머지 개미들 죽이기는 바로 포기했다. 역시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결코 아니며, 그저 개미가 너무 많아 모두를 다 죽이기가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파트 베란다 화분 위를 자유스럽게 돌아다니던 그 많은 개미들 중 알 수 없는 이유로 딱 한 마리만 불운하게도 죽게 되었던 셈이다. 그 개미 꼭 집어 죽이겠다는 어떤 의지를 내가 품었던 적도 없고, 그 개미 입장에서도 자신만 죽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 개미 한 마리만 죽었고 주변의 나머지 개미들은 모두  무사했다.


그때 갑자기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개미들에게는 내가 그들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였듯이, 조물주 즉 인간의 절대자 입장에서 보면 인간도 결국에는 개미 비슷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던 것이었다.


인간은 모두 서로 다르고 다양한 각자의 운명 속에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입장에서 본 우리들 생각일 뿐이고, 화분 위의 모든 개미들이 구분 없이 내게는 그저 똑같게만 보였던 것처럼, 조물주 눈으로 보면 지구 상 그 많은 인간들 역시 결국은 모두 다 하잘 것 없고 중요하지 않은 개미와 같은 존재로, 때로는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알기 어려운 이유로 시련을 당하고 또 죽기도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던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이 전혀 말이 안 되고 또 섣부른 오류 투성이의 어설픈 생각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개미와 비교해서는 너무도 막강하고 '절대적' 권능을 가지고 있던 '나'라는 존재로 인한 어떤 개미의 정말 아무런 이유 없는 죽음을 그날 목도하면서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던 것만은 분명했다.


46살 너무도 이른 나이에 이 땅을 떠난 동생의 유해가 있는 납골당에 가보면 그 주변에는 동생보다도 훨씬 더 어린, 불과 10살도 안된 시점에 이 땅을 떠난 사람들의 영정 사진들이 허다하다. 이런 죽음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완성된 토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 토기를 만든 토기장이가 깨뜨려버렸을 때 토기가 토기장이에게 자신을 왜 깨뜨리느냐고 반박수는 없다고 하는데, 결국 생명의 죽음도 이러한 개념 연결되는 것 아닌지....



사라진 조카의 기억


누님은 20대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이혼당했다'. 조현병이 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결혼한 누님이 시어머니와 시누이로부터 엄청난 시달림을 받았고 이로 인해 거의 완치됐던 초기 조현병 증세가 악화되고 고착되었다는 것이 사실 이 '이혼당함'의 또 다른 숨겨진 진실이었다. 물론 전 남편 집안에서는 결코 안정하지 않사실이었지만....


어쨌든 이혼당해 혼자 살고 있는 누님만 보면 내게는 조카가 되는 누님의 유일한 아들이 생각난다. 그런데 누님은 이 조카가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혼을 당했는데, 참으로 대단하다 싶은 것이 이혼 이후 누님이 아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아들이 10살 때인가가 마지막이었다는 것이다.


조카가 어릴 때야 아버지와 계모가 막아서 생모를 찾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그 조카도 이제는 40살 가까운 성인이 되었을 텐데도, 자신의 생모를 단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다. 원래 조카 성격이 그런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아버지와 계모가 너무도 심하게 생모와의 만남을 반대해서인지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신의 생모가 때로는 궁금하기도 할 것 같은데 수십 년 간 전혀 찾은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런 조카가 이제 막 걸어 다니기 시작하던 시절 청탑 우리 집에 누님과 함께 왔을 때 경험했던 일에 대한 아련한 기억이 하나 있다....


지금은 중경 고등학교지만 1989년까지는 한강 중학교였던 학교가 청탑 아파트 바로 옆에 있었다. 당시 누님은 친정인 청탑 아파트 우리 집에 오면 곧바로 자신의 예전 방에 들어가 너무 힘들다며 방문 잠그고 누워버리곤 했다. 그러면 조카는 어머님, 아버님께서 돌아가시며 잠시 보다가 두 분이 지치시면 이제 순서가 됐다. 누님이 방에서 나올 때까지는 내가 봐줘야 하는 것이었다.

 

그때 조카를 데리고 청탑 옆 한강 중학교 운동장으로 간 적이 있다. 조카는 그래도 나를 꽤 잘 따랐기 때문에 중학교 운동장까지 함께 가 것에는 전혀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사진) 한강에서 바라본 중경 고등학교 모습. 이 공간은 과거 1973년부터 1989년까지 약 16년 간 한강 중학교가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그때 한강 중학교 넓은 운동장의 휑한 중심 부근에 도착하자 조카는 엄마가 있는 공간으로부터 너무도 멀리 왔다는 것을 갑자기 깨우치게 되었고 이내 표정이 울상으로 변하기 시작하더니, 연신 손가락으로 엄마가 자고 있는 청탑 아파트 집 방향을 가리키면서 제대로 발음도 안 되는 말로 '무(엄마)'만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평소에 그렇게 잘 따르던 삼촌이 바로 옆에 지키고 있어도 전혀 아무 소용이 없었고 오직 엄마만 애타게 찾았던 것이다.


삼촌이라는 존재도 엄마가 없으면 결국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을 깨우친 나는 좀 섭섭했지만, 도무지 조카를 달랠 방법이 없었고 바로 조카를 데리고 누님이 계신 청탑 아파트로 돌아와야만 했었다.


사진) 정문에서 바라본 중경 고등학교 운동장 최근 모습. 좌측 건물만 새로 추가됐을 뿐 조카와 함께 방문했던 시절의 한강 중학교 운동장 모습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런 기억이 진하게 남아있는 조카인데, 그랬던 조카가 나이 40이 가까워질 때까지 자신의 생모를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냉혹한 현실을 보면 인간의 혈육 관계 역시 생각했던 것만큼 진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기도 했다....


청탑 아파트를 회상하면 한강 중학교 운동장과 함께 아직도 꼭 떠오르는 사라져 버린 조카에 대한 기억이다.


사진) 누님이 이혼 이후 헤어진 아들과 만났을 때 찍은 사진, 아주 어릴 때와 10살쯤 됐을 때 사진이다.


원래 이 글은 이 부분에서 끝이었다.

그런데....

글을 좀 더 추가하지 않을 수 없는 정말 놀랄 만큼 신기한 일이 발생했다....


조카에 대한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 올해 92세이신 어머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놀랍게도 바로 이 조카로부터 생모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30여 년 만에 연락이 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실제로 어머님과 누님이 계신 경북 문경 산골로 조카가 찾아왔는데, 조카 옆에 한 명이 더 있어 자세히 보니 조카의 아버지 즉, 누님의 전 남편이었다는 것이었다. 아들과 전 남편, 가족 모두가 동시에 나타나서 자그마치 3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었다....


어머님의 그 말씀을 듣고 나는 혹시 이 글과 이 글에 올린 사진을 조카가 우연히 보고서 가책을 느껴 그런 연락을 했나 하는 순간적인 착각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 글은 아직 작성 중으로 이번 주말에나 공개가 될 예정인 바 조카가 볼 수 있는 상황은 전혀 아니었다.   


그간 조카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언급한 적도 없었는데, 또 어머님과 통화 시에도 서로 조카에 대해 언급한 적도 전혀 없는데, 이 글을 쓰자마자.... 정말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묘한 우연의 일치인 것 같았다.


한편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조현병을 앓고 있는 누님은 37살이 됐다는 성장한 아들은 잘 알아보지 못했다는데, 전 남편은 알아보는 것 같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두 번째 이혼해서 혼자 살고 있는 전 남편이 미안하다고 말하며 잠시 누님을 껴안았는데 누님이 평소에 타인들에게 보이던 행동과는 달리 조금도 거부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과거 부부였던 두 사람은 30여 년만에 한동안 껴안고 있었다고 한다....


앞에 혈육관계도 생각만큼 진하지 않을 것이라고 적었지만 이제 그 글은 '혈육관계는 정말로 진한 것"이라고 정정을 해야 할 것 같다. 아울러 또 비록 한때였지만 부부의 인연이란 것도 참으로 유별나고 끊질기다는  역시 추가해야만 할 것 같다....



떠나가신 아버님에 대한 불효자의 기억들


청탑 아파트 거주할 때 기억나는 것들 중 마지막은 2001년 돌아가신 아버님과 관련된 기억들이다.


하루는 아버님께서 아침이 한참 지났는데도 방에 그냥 누워 계셔서 방으로 들어가 오늘은 어디 안 가시냐 문의드린 적이 있다. 그때 아버님께서는 누우신 채로 내게로 고개를 돌리시며 꽤 어색한 웃음과 묘한 표정으로 말씀하시기를 "일어나려 해도 일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아버님께서는 60대 초반으로 아직은 그렇게 연로하신 연세도 아닌 데다가 또 어떤 질병으로 치료를 받고 계시던 상황 또한 전혀 아니셨기 때문에 나는 아버님의 그런 말씀을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별생각 없이 외출을 했는데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어머님께 들어보니 아버님은 그날 몸이 어디 편찮으신 것도 아닌데 반나절 이상을 전혀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만 계셨다고 했다.


결국 아버님께서 아침에 보이셨던 그 어색한 웃음과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은 연세가 들어가시면서 당신 신체에 갑자기 이상이 생기는 섬뜩한 경험을 처음 하신 아버님께서 느끼셨던 공포로 인해 야기된 두려움의 표현이었던 이다. 


이후 세월이 흘러 아버님께서는 돌아가셨고, 내가 당시 아버님의 연세 근처로 가는 나이가 되다 보니 늦게나마 이제야 그때 아버님께서 느끼셨을 공포의 정도가 이해된다....


아버님께서 한번 이렇게 당황스러운 일을 경험하신 후에  년이 더 지났을 때였다. 아침에 동네 산책을 하러 나가시는데 옷을 꽤 차려입으시고  당시 어르신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머리용 기름인 '포마드'까지도 말끔하게 바르고 나가시길래 "아니 동네 산책하러 가는데 왜 그렇게 외모에 신경을 쓰시느냐, 어디 데이트하러 가시느냐"라고 농담처럼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님께서는 "혹 산책하다 정신 잃고 길에 쓰러졌을 때 행색이 초라하면 노숙자로 취급해 행인이 도와주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아버님께서는 당시 이미 어쩌면 발생할 수도 있는 갑작스러운 이상으로 인해 야기되는 사고의 가능성에 대해서까지도 생각하고 계셨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도 아버님의 그 답변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역시 내가 나이가 들어가다 보니 요즘 늦게나마 아버님께서 연세가 들어가시면서 그 당시 품으실 수밖에 없었던 점점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님 살아생전 그때, 그런 두려움을 느끼셨을 때, 옆에서 따뜻한 말씀이라도 한번 올리지 못했던 것이 이제야 뒤늦게 막심한 후회가 된다.  


사진) 우리가 청탑 아파트 거주하던 시절인 1992년 아버님 연세 67세 때 사진, 아버님은 이 사진을 찍으신 후 9년을 더 우리와 사시다가 2001년 76세를 일기로 이 땅을 떠나셨다


사진) 2001년 이 땅을 떠나신 후 아버님 흔적이 남아있는 곳. 아버님 고향 북한 땅이 멀리서 보이는 경기도 파주에 있는 동화 경모 공원이다.


사진) 저 컴컴한 무덤에 뭍여 이미 이 땅을 떠나신 아버님도 한때는 이 땅에서 이렇게 사랑도, 공부도 했고 친구들과 활동적으로 어울려 다니시던 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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