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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T May 08. 2022

이촌동 연가 (11)

■ 한강 바로 앞 5층 한 동짜리 청탑 아파트 - 1/2

제일 맨션에 살다 80년대 중반 '청탑 아파트'라는 아파트로 다시 이사를 했다. 1970년 이촌동으로 이사 온  살았던 이촌동 내 6번째 아파트다.


청탑 아파트는 달랑 40 가구로만 구성된  동짜리 건물의 5층 아파트로 한신 맨션 뒤에 있으면서 한강 바로 앞에 있던 아파트였는데 90년대 말 한신과 함께 재건축되어서 현재는 삼성 리버스위트 아파트로 탈바꿈되어 있다. 청탑 아파트는 아파트 이름 '청탑(靑塔)'에 걸맞게 옥상의 테두리 부분이 푸른색으로 칠해져 있던 것이 특색이었는데 우리 가족은 이 아파트 403호에 거주했었다.


사진) 2022년 1월 현재 삼성 리버스위트 모습. 가장 뒤에 있는 건물 자리에 청탑 아파트가 있었으며 그 앞의 아파트 건물 자리에는 한신 맨션이 있었다. 


사진) 2022년 4월 왕궁 아파트에서 바라다본 과거의 청탑 아파트 자리. 중앙의 102동이란 표시가 있는 바로 그곳에 한 동짜리 청탑 아파트가 있었다. 청탑 앞은 강변북로였고 강변북로를 건너면 바로 한강이었다.



너무도 강열한 한강 햇살의 기억


청탑 아파트에는 80년대 중반에 이사 가서 99년까지 10년 이상 비교적 오랜 기간 거주했었는데, 아파트가 한강 바로 앞에 있어서 집 베란다에서 내려다보이는 한강 경치는 정말 일품이었다. 겨울에는 온통 새하얀 눈밭이었으며 여름에는 강이 있고 또 르른 녹색이 가득한 거대한 정원이 마치 에 있는 처럼 내려다보이기분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어머님께서 이 집 거실 바닥을 온통 니스 같은 도료로 마감을 하게끔 하셔서 정남향이었던 베란다 창문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는 햇살이 일 년 내내 집 안 가득히 반사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결국 집안 내부로 직접 들어오는 햇살, 한강 수면 위에서 반사되어 들어오는 살, 마지막으로 거실 바닥 니스 표면 위를 통해 집안 구석 이곳저곳에까지 반사되는 햇살 등 3 가지 햇살이 온 집안에 가득했던 이었다.


그 모습이 때로는 정말 몽환적이기도 했는데, 그런 장면을 좀 더 오래 간직하고 싶어 사진으로 찍어 두었음에도 해외 주재 근무 나가면서 후배에게 맡겨 두었던 그 많은 사진을 후배가 모두 분실해 이제는 더 이상 그 장면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몽환적이 인상적인 광경은 머릿속의 기억으로는 너무도 또렷하게 남아있다.


나중에 홍콩에 주재 근무할 때 청탑에서 느꼈던 경치와 꽤 유사한 경치를 체험하기도 했는데, 바로 아래 사진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 사진은 구룡역 위의 Elements라는 아파트 단지에 있는 집에서 홍콩섬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인데 역시 정남향이라 강한 햇살이 집안으로 깊숙이 들어오는 그러한 구조였다. 청탑 아파트 살 때 봤던 한강의 강열한 햇살을 정말 오랜만에 홍콩에서 다시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진) 홍콩 아파트에 입주하기 전 집안에 아무 가구도 없을 당시 집에서 창밖으로 빅토리아만을 내려다보며 찍은 사진 (2009. 2월)


물론 청탑에서 보이던 것은 한강이었고, 홍콩에서 본 것은 빅토리아만, 즉 바다였으니 근본적으로는 큰 차이가 있다. 지만 어쨌든 집 창 바로 밖으로 아름답고 거대한 물길을 내려다본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외로웠던 객지 홍콩에서 홀로 살면서 와인 한잔하며  황홀한 경치를 내려다볼 때마오래전 아련 과거에 청탑 아파트에서 내려다보았던 경치를 회상하곤 했었다.


그런데 세월이 정말 무섭게 흘러서, 홍콩의 기억이 벌써 10년이 넘고 청탑의 기억은 이미 30년 가까이 되어간다....


청탑과 홍콩 아파트의  환상적인 그 햇살들, 남은 인생에서 또다시 볼 수 있을지....



청탑에 체류하던 외국인들


사진) 청탑에 거주하던 시절 외국인이 우리 집에서 한동안 체류할 때 어머님, 누님과 함께 찍은 사진 (1986년)


청탑에 거주할 때는 유난히 외국인들이 우리 집에 체류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버님 대학교 동창으로 프랑스에서 교수를 하시던 분이 제자를 한국으로 보낼 때 우리 집에서 숙박을 하기도 했었고, 또 일본에 유학가 있던 동생이 역시 제자를 한국으로 보내서 그 제자가 우리 집에 꽤 오래 체류하기도 했던 것이었다. 한편 우리 집에서는 아버님 동창과 동생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들의 숙박비를 받지 는 상황이었으니 당시 우리 집에 체류했었던 외국인들 입장에서는 나름 적지 않은 숙박비를 절감할 수 있었던 셈이다.


위 사진에 보이는 외국인도 청탑 우리 집에 머물던 외국인 중 한 분일 텐데 아쉽지만 이분이 누구였는지는 바로 옆에 앉아 함께 사진을 찍었음에도 도무지 기억이 없다. 아마도 프랑스에 계신 아버님 동창분께서 우리 집 체류를 부탁했던

아랍계 프랑스인 제자 아닌가 싶다.


한편 뚜렷하게 기억에 남는 외국인도 있는데 역시 프랑스에 계신 아버님 친구분이 부탁했던 베트남계 프랑스 여대생과 동생이 부탁한 일본 여대생이다.


베트남 여대생은 1976년 베트남이 공산화되면서 베트남을 탈출한 베트남인들 중 하나라 했는데, 베트남의 꽤 대단한 부잣집 출신이었던 것 같다. 그것을 기억하는 이유는 당시 어머님께서 어느 날 내게 말씀하시길, 그 베트남 여대생이 몸에 걸친 온갖 보석들은 대단히 비싼 것들이고 너는 평생 구경도 못할 물건들이니 혹 장난치다가 잃어버리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고 당부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었다. 베트남 공산화 전에 매우 많은 베트남 부자들이 공산당이 두려워 해외로 이주했다는데 그녀도 역시 그러한 가족의 자녀였던 모양이었다. 


중국의 공산화 시점에 적지 않은 부자 중국인들이 홍콩으로 탈출했다 하고, 베트남에서도 그렇게 많은 부자들이 해외로 탈출했는데, 세월이 흘러 결국 중국에서나 또 베트남에서나 또다시 엄청난 부자들이 늘어나는 현상을 보게 되면 역사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한편 그녀 이름은  특이해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징종'이 그녀 이름이었다. 애칭인지 혹은 별명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자신을 그렇게 부르라 했고 우리는 항상 '징종'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있다.


동생이 보낸 일본 여대생은 한국에서 대학을 다녀 1년 이상 체류하고 있었는데 잊히지 않은 두 가지 기억이 있다. 그중 하나는 그녀가 기차를 타고 지방에 가다 멀리서 일본어처럼 들리는 말이 있어 일본인이 있는 줄 알고 가까이 가봤더니 일본인이 아니고 경상도 분이 경상도 방언으로 말씀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때 경상도 방언과 일본말이 은근히 비슷하다는 일본인의견처음으로 게 되었는데,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경상도의 일부 지역 방언과 일본어 모두 공통적으로 쌍시옷 발음이 없고 또 억양이 꽤 비슷하게 들려 그 일본 여대생이 기차 안에서 그런 혼동을 하지 않았나 싶다.


(일본어 뿌리는 경상도 사투리)

https://www.joongang.co.kr/article/2063339#home


다른 기억은 어느 날 식사를 마친 그녀가 부엌 싱크대에서 설거지를 하는데 뒤에서 우연히 보니 다리가 정말 너무나도 심하게 'O자'로 굽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심한 것 같아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솔직히 느낀 바 그대로 표현을 한다면 오랑우탄의 휜 다리를 그날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던 것이다. 이미 몇 달째 그녀는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았지만 그녀의 다리가 그토록 휜 상태인 것은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평소에는 그러한 느낌을 지 못했던 이유는 아마도 본인이 항상 꽤 신경을 써서 그렇게 보이지 않게 조심을 해왔는데 설거지를 하면서는 다리에 신경을 쓰지 못해 원래의 모습이 그대로 보였던 것 같았다.


대단한 미모에 성격 너무도 선하고 좋은 일본인이었는데 그처럼 본인이 굳이 숨기고 싶었던 신체적 부분 한편으로 있었던 것이었다.


(일본 여성 오다리 심한 이유)

https://m.insight.co.kr/news/146898


50년이 넘게 이촌동에 거주하면서 무려 8개 아파트를 이사 다니며 거주했었지만 그 기간 외국인이 우리 집을 방문했던 적은 있어도 몇 달 이상씩 거주를 했던 것은 청탑 아파트가 유일했다. 왜 청탑 아파트 거주할 때그런 경험이 유독 집중됐었는지 오랜 시간이 흘러버린 지금 다시 생각해도 좀 특이하다....



은행 알 '왕창' 먹고 깨보니 병원


군대에 복무하던 시절 휴가를 나와 청탑 아파트 집에 잠시 머무를 때였다. 휴가 나오면 친구들과 함께 당시 유행했던 이촌동 로바다야끼 같은 음식점에서 술도 한잔 하곤 했는데 그때 안주로 자주 먹었던 짭짜름한 은행 볶음이 맛은 너무 좋았지만 양이 너무 적었 것이 항상 불만이었다.


그래서 휴가 중 하루 날을 잡아 이촌 시장에 가서 은행알을 큰 봉지로 한 봉지 왕창 사서 집으로 가져와 소금을 넣고 한 사발 정도를 신나게 볶아서 안주로 먹었다.


그리고는 내 방으로 들어와 잠을 잤는데, 얼마가 지났는지 눈을 떠보니 어느 병원 침대에 내가 누워 있고 침대 옆에는 부모님께서 나를 너무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계셨다. 이후 부모님 설명을 들어보니 내가 한꺼번에 너무 많이 섭취한 은행알 독에 중독되어 한밤중에 실신을 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적당량의 은행알 섭취는 건강에 도움이 되나 은행알에는 원래 '메칠피리독신'이라고 불리는 독이 있어서 한 번에 너무 많은 양을 먹으면 의식을 잃거나 발작을 일으키며 심할 경우에는 사망할 수도 있다고 다.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던 나는 그날 동시에 먹었던 은행이 너무나 많았고 결국 실신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었다.


(은행 과다 섭취 시 문제점)

https://www.joongang.co.kr/article/9304327#home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잠을 자다가 조용히 누워서 실신을 했으면, 그 누구도 내가 실신한 것을 알 수가 없었을 것이고 결국 나는 누워있는 상태 그대로 사망에까지 이르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만 나는 한밤중에 내 방문을 열고 나와 문 앞에 쓰러졌고 내가 쓰러지는 둔탁한 소리를 듣고 마침 어머님께서 잠에서 깨셔서 소리가 났던 내 방으로까지 쓰러진 내 모습을 보게 되셨던 것이었다.


즉, 살려고 그랬는지 다행히 자다가 일어나서 방문을 열고 나와 쓰러진 덕분에 나는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러한 소리를 듣고서 때마침 어머님께서 잠에서 깨셨기 때문에 그날 죽지 않고 살 수가 있었던 이다. 어머님 바로 옆에서 주무셨던 아버님은 그날 아무런 소리도 못 들으셨다 하셨다.


결국 몇 가지 행운과 우연들이 겹치면서 난 20대 한참 젊은 나이에 죽을뻔했던 위험에서 살았던 셈인데 아마도 당시는 아직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로부터 약 40 년 가까이 시간이 흘러간 현재 그때 생명을 연장해준 이유대로 내 삶을 살고 있는지 자문해 보면 왠지 그렇다고 자신 있게 답하기가 머뭇거려지는 것이 실이다.


불쌍해서였는지 아니면 아직 이 땅에서 해야 할 일들이 좀 더 남아있어서인지 어쨌든 신이 구해주셨던 번뿐인  생명 정말 제대로 잘 살아야만 할 텐데 실제 그렇게 살고 있는지.....


You only live once란 말이 점점 더 가슴에 와닿는 나이가 되어버렸는데 이미 너무 늦지는 않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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