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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T Dec 20. 2019

미련 없이 잊으려 해도....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2편 Toronto-21)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Toronto



21. 미련 없이 잊으려 해도....


캐나다 법인에 근무할 때, 법인에는 두 명의 중국인 여성이 있었다. 한 명은 직속 부하 직원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재무 부서에 인턴으로 들어온 직원이었다.


부하 직원은 칭화(淸華) 대학교라는 중국 명문대를 졸업한 후 캐나다로 이민 와서 살고 있는 30대 초반 여성이었는데, 캐나다 현지 직원들 사이에서는 '불도그(Bulldog)'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고집이 세기로 유명한 직원이었다.


그런데 그녀와 나 모두 당시 혼자 사는 사람이어서 일하다 보면 점심뿐 아니라 저녁식사까지도 이따금 같이 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어느 날 식사하던 중 갑자기 그녀가 제안을 하나 했는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집을 Share 해서 같이 살자는 것이었다. 여자가 내 집에 들어와서 같이 살겠다는 말에 난 당황해서 처음에는 답도 제대로 못했는데 어쨌든 결국에는 거절했다.


중국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만 해도 이웃나라인 중국의 사람들은 우리와 사고방식도 많이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우선 중국에서는 남녀 간 동거가 꽤 흔하다. 대학시절부터 남녀 간에 동거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는데 그렇게 동거하다가 서로 마음이 맞으면 결혼하고 아니면 쿨하게 헤어진다.


동거에 대해서 한국인만큼 민감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런 면에서만은 적어도 한국보다 훨씬 더 서구화되어 있었던  같았다. 물론 한국에서도 남녀 간 어린 나이에 연애하고 동거 이상의 관계로까지 가는 경우도 겠지만, 노골적이고 공개적으로 동거를 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 것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그녀가 왜 갑자기 그런 제안을 내게 했을까 생각을 더듬어 보니 아마도 나 자신부터 캐나다 부임 초기에 너무 힘들고 외로운 상황에서 그녀와 같이 식사도 하러 다니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녀를 직장 동료만이 아니라 여성으로서 일부 생각했던 부분도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다.  


그런데 참 신기했던 것은 내가 그녀의 동거 제안을 그렇게 거절하고 나면 이후 관계가 좀 불편해졌을 것 같기도 한데, 그녀는 전혀 그런 내색이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업무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나를 대할 때  제안하기 전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원래 중국문화가 그런 것인지, 아니면 공산화 이후 중국이 급속히 변한 것인지 이도 저도 아니면 유독 그녀만 그랬던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국의 정서와는 너무 달랐다.




다른 중국인은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홍콩 사람이었다. 그녀는 20대 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우리 법인에 인턴사원으로 와서 한 2~3달 정도 잠시 근무하다 떠났다. 그녀와 대화하면서 기억에 깊게 남았던 것은, 그녀를 중국 사람이라고 부르면 그녀는 바로 자신은 중국사람이 아니라 홍콩 사람이라고 정정하곤 했던 것이었다.


약 150여 년이라는 너무 긴 기간 영국 식민지배를 받았던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것이 1997년이고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이 2001년 경이니, 홍콩 반환 후 이미 4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자신이 중국인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큰 거부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거부감의 이유와 배경 나중에 홍콩 법인에 주재 근무하게 되면서 너무나도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 사고방식 등 거의 모든 면에서 홍콩인은 중국인은 완전히 달랐던 것이었다.


그녀는 키도 크고, 미인이라 법인의 남자 직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았는데 법인의 한국 교민 직원들은 그녀에게 '포동이'라는 귀여운 한국식 별명까지 지어 주기도 했었다. 물론 포동이라 불리는 그녀 당사자야 당연히 그러한 별명이 무슨 뜻인지 어떤 어감을 갖고 있는지 전혀 몰랐겠지만....


나는 사실 이성적으로 그녀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았고, 2~3달 인턴쉽을 끝내고는 떠나버리는 바람에 더 이상 무슨 인연을 만들어 갈 수도 없었다.  




법인의 교민 직원 중에는 부모와 함께 이민 와서 살고 있던 이민 1.5세 여성이 있었다. 인상도 좋았고, 성격 역시 참 좋다. 그녀와도 때때로 식사를 같이 하러 다니곤 했었고 자연스럽게 연애하는 감정까지 갖게 되었다.


그리고 법인의 주재원이나 직원들도 우리의 그러한 사이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갑자기 그녀와의 만남이 소원해졌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무슨 일로 그렇게 되었는지 기억이 없는데 어쨌든 그렇게 그녀와 멀어졌다.


어쩌면 매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또 아름다웠던 그녀가 내게는 너무 과분한 사람이라 신이 그렇게 명확한 이유조차 없이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그 좋은 인상, 그 좋은 성품대로, 좋은 남자 만나서 캐나다 하늘 아래 어디에선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축복 속에 잘 살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우리가 '김기사'라고 불렀던 김 씨 성의 한국 교민 직원도 있었다. 그녀 역시 성격이 너무나 좋아서 교민 직원들끼리 저녁 식사하면서 술 한잔하면 자신은 술 전혀 마시지 않고 나 포함 직원들 모두 각각 집으로 바래다줄 정도였다. 한두 번도 아니고, 수시로 그녀가 그렇게 바래다 오죽하면 여성인 그녀에서 우리가 '김기사'라는 별명까지 붙여주게 되었겠는가....


그녀는 혼자 캐나다에 와서 살고 있었는데, 워낙 알뜰하고 열심히 살아서 젊은 나이에도 캐나다에 주택도 한 채 갖고 있었다. 나중에는 미국으로 이사 가서 미국에서도 회사를 다녔는데, 내가 홍콩에 근무할 때 미국에서도 가끔 연락이 오곤 해 전화나 메시지를 주고받곤 했었다.


최근 소식을 들으니, 얼마 전 좋은 남자 만나서 아이들 낳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그녀가 타인에게 베풀었던 배려만큼 큰 축복을 누리고 살고 있을 것이다.




본사에 있을 때 직장 상사였던 의 딸이 캐나다에 유학을 오게 되었는데 그 상사분이 그 딸을 좀 돌보아 달라고 내게 부탁해 온 적도 있었다.


그분은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를 이미 떠나서 다른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내가 서 출장 갔을 때 어떻게 알았는지 보자고 연락이 와서 만나 뵙고 식사를 같이 했다. 그런데 식사 중 불쑥 캐나다에 유학 갈 딸이 있으니 좀 부탁한다며 그 애를 한번 보고 가라고 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결국 상사분 집에까지 가서 조만간 유학을 오게 될 딸을 소개받았고 그녀는  몇 달 후 예정대로 토론토에 왔다. 한편 그녀는  상사분이 젊은 시절 당시에는 지점이었던 캐나다 지점에 근무할 때 그곳에서 태어났었기 때문에 속지주의를 따르는 캐나다 법에 의거 캐나다 국적을 갖고 있었다.


100% 한국인처럼 생겼고 영어도 못해 캐나다로 유학 오기 전 학원을 다니며 영어를 열심히 배워야만 했지만 그녀는 따라서 엄연한 캐나다 사람이었는데, 외국인이 내가 캐나다 땅에서 캐나다 사람인 그녀를 돌봐줘야 하는 우스운 상황이 발생했던 셈이었다.


그녀는 토론토 리치먼드 힐(Richmond Hill) 근처의 어느 대학인가 학원인가에 등록을 하고 다녔는데, 초기에 물건도 좀 함께 사고, 여기저기 구경도 시켜 주고, 잡다한 일들까지 도와주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어느 정도 정착이 된 것 같아 별로 찾아가지 않았다.


그런데 1년 정도 지난 후 그 상사분이 딸도 볼 겸 겸사겸사 토론토에 왔을 때 그 딸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아저씨가 요즘도 자주 찾아오지?"라고 물으니 그 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니요, 처음에는 자주 왔었는데 요즘은 통 안 와요"라고 답을 해, 전에 모셨던 그 직장 상사 앞에서 꽤나 곤란했던 적이 있었다.


좀 돌봐 달라고 부탁했는데 찾아오지도 않는다니, 아버지는 많이 서운했을 것 같은데 어쨌든 농담 비슷하게 그 애매한 분위기는 넘어가긴 했지만, 어쨌든 내가 자주 찾아가지 않은 것을 그녀가 꽤나 서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캐나다 주재를 끝내고 귀국하고 나서는 그녀를 다시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내가 중국 지역에 주재하면서 잠시 서울에 출장 왔을 때,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번 보자는 것이었다. 그 사이 그 상사는 불행하게도 등산하던 중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런 일로 서운하기도  나도 오랜만에 그녀가 보고 싶기도 해서 그러자고 하고 을지로 어느 식당에서 만났다.


그런데 만나서 이런저런 옛날 얘기를 하는데 분위기가 다소 이상해지는 것 같더니, 그녀가 갑자기 내게 남녀 간의 연인 관계처럼 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와 함께 토론토에 있을 때 몇 명이 함께 또 때로는 단둘이 Ottawa, Thousand Islands 등 토론토 인근 유명 명소 여기저기 구경도 다니긴 했다. 하지만 그녀와는 나이 차이15 이상으 꽤 많았고 연인과 같은 분위기로는 발전하지 않았는데, 불쑥 그런 관계인 것처럼 대화를 하려 하니 영 어색하고 이상했다.


결국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고 그날은 그렇게 어색하게만 헤어졌는데 이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그녀로부터 편지가 하나 왔다. 열어보니 그 안에는 그녀가 결혼한다는 내용의 청첩장이 들어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날 그녀가 오랜만에 자고 해서 만났던 그 만남은 그녀가 자신의 결혼 전 내게 주는 일종의 마지막 기회였 셈이었.


그녀 또한 참 성격 좋고 선한 사람이었다. 결혼식장에까지 가서 남편을 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좋은 남편 만나 많은 축복을 받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을 것이다.  




2008년에 세상을 떠난 가수지만, 장현이라는 가수가 부른 '미련'이라는 노래가 있다. 원래 오래전 1972년에 발표된 곡이었 약 30년 뒤에 2003년 상영된 영화 '클래식'에 삽입되면서 젊은 분들에게도 어느 정도 다시 알려지게 된 노래다.


시를 읊는 것 같은 장현 씨의 나지막한 창법이 너무 좋았고, 가사 역시 마음에 와닿는 노래인데, 그 가사 중에 "미련 없이 잊으려 해도...."라는 구절이 있다.


지나고 나니 캐나다에서당시에정말 절실하게 느끼지 못했던 그런 잊지 못할 미련들 많았던 것 같다. 작고한 장현 씨의 애절한 노래처럼 결코 다시는 돌아갈 수가 없어 그 미련과 그리움만 더해지는 그런 기억들이다....


(영화 클래식에 삽입된 곡 '미련', 03:43)

https://www.youtube.com/watch?v=ynOgPjsVV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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