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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T Dec 08. 2019

술과 함께 흘러간 인생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2편 Toronto-18)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Toronto



18. 술과 함께 흘러간 인생 


과거와 비교해 볼 때 이제는 그런 관습이 많이 없어졌지만, 캐나다 주재 당시인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출장자가 오면 거의 예외 없이 저녁에는 식사와 함께 술을 마셔야 했다. 또 술도 적당히 마시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만취가 될 때까지 마시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사실 나도 술을 즐긴다. 따라서 어느 정도 마시는 것은 전혀 부담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3~4시간 이상을 죽자고 마시는 경우다. 술을 오래 길게는 마시지 못했던 나는 그럴 경우 출장자 직급이 나보다 낮다어느 정도 선에서 그만 마시자 중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나보다 직급이 높은 경우, 특히 임원분들이 출장 오면 그분들이 이제 그만 마시자고 할 때까지 직급이 낮은 나는 계속 옆에 같이 앉아 술을 마셔야 했다.


그분들이야 호텔이 바로 앞이니 술을 마시다 그저 들어가서 잠을 자면 되지만, 비록 운전해서 가면 5분 이내 꽤 가까운 거리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나는 차를 운전해서 집에 가야만 했는데 그러한 사정을 배려해 주는 출장자는 거의 없었다.


캐나다에 대리 운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음주운전을 조장하는 행동인데, 2000년대 초만 해도 요즘과 달리 그런 문제의 심각성이 한국인들 사이에서만은 그렇게 민감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던 시절이었다.


결국 정말 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 캐나다에서의 그 시절로 되돌아간다면 결코 다시는 하지 않을 일이지만 음주 운전을 했던 적도 있다. 심지어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없을 만큼 마신 적도 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주차장에 내려가 보면 내 차가 거기 있었다. 기억을 잃을 만큼의 술을 마시고도 직접 차를 운전해서 집으로 왔다는 얘기다.


그 정도로 마시고 운전하다 경찰에 적발으면 아마도 나는 그날 바로 캐나다 감옥에 투옥되었을 것이다. 현지 경찰에 적발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만일 음주운전으로 인해서 교통사고가 발생했는데 차라리 내가 죽지 못하고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는 그러한 죄를 짓게 된다면 감옥에 투옥되는 것과 별개로 그 죄책감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 남은 인생을 평생 지옥 속에 있는 것 같은 심정으로 살아야 했을 것이다.


'다행'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적합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어쨌든 다행히 음주 운전으로 인한 사고는 한 번도 없었는데,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절대로 두 번 다시는 그런 범죄와 같은 '다행'을 기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토론토에서는 한국에서처럼 길 막고 무작위로 음주측정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모임이 많은 연말에는 토론토에도 그런 음주단속이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내가 직접 보거나 경험한 적은 없다. 대신 최근 한국에도 도입된 것처럼, 아무 표식이 없는 경찰차가 도로에 다니며 음주운전 의심 차량을 잡아낸다.


이러한 암행 순찰차는 겉으로 보면 일반 차량인데, 사실은 교통경찰 차량이고 음주운전이 의심되는 차량이 발견되면 그 차 뒤를 따라다니며 관찰하다 차량이 좌우로 왔다 갔다 한다든지 하는 특이한 모습을 보여 음주 운전한다는 의심이 들면 바로 그 차를 세우고 음주 측정을 한다.   


이때 음주로 판명되면 사고가 있었건 없었건 전혀 관계없이 처벌은 한국보다 매우 가혹하다고 들었다. 술병 심지어 빈 술병도 차 안에 있으면 음주운전으로 간주될 우려가 있다고 해서 술병은 빈 병까지도 항상 차 뒤 트렁크에 싣고 운전을 해야 했다. 그만큼 음주운전에 대한 규제와 처벌이 엄하고 가혹했던 것 같다.  


음주 후 폭력, 폭언 등 사건사고가 발생했을 에도 취중에 실수했다고 정상참작을 바라는 그런 기대는 캐나다에서는 결코 하기 어려울 것이다. 도수가 높은 술 마시기를 즐기는 것을 정신적인 문제로까지 간주하는 사회적 인식이 강해서 오히려 더 엄한 처분을 받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토론토에서 술을 어느 정도로 부정적으로 보는지는 판매가 허가된 공식 장소 이외의 장소에서의 음주는 음주 자체가 불법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공원처럼 공공장소에서는 당연히 술을 마실 수 없다. 심지어 마시지 않았다 해도 술병 마개가 개봉된 상태로만 들고 다녀도 그 자체로도 처벌받을 수 있다 한다. 한국의 한강 고수부지나 도심의 공원, 바닷가 등등에서 공공연한 술자리가 벌어지는 우리의 현실과는 꽤 다른 것이다.


한국에서의 술에 대한 인식은 많이 변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캐나다와는 다른 것 같다. 건강에 좋지 않은 술을 마시라고 잔이 비면 계속해서 따라주것이 여전히 예의로 인식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이제는 그것이 결코 예의가 아니라 친구의 건강을 해치는 위험한 행동이라는 것을 인식될 때도 되지 않았을....


건강에  좋은 술 마시고 싶으면 본인만 마시면  것인데, 상대방에게까지 계속 권해서 동료의 건강까지 같이 상하게 하자는 것은 무슨 심보인지....




술이 육체적 건강을 상하게도 하지만 정신적으로도 고통을 가져다주는 경우도 많았다. 바로 직장의 상사와 술자리를 하는 경우에 그런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경우 술자리에서의 대화는 대화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일방적 독백 또는 훈시로 변하는 경우가 많았다.


직급이 높은 사람이 주로 자신의 무용담 같은 얘기를 하고, 나머지는 그 얘기를 들어주는 역할을 하는데, 그 얘기들이 대부분 신입사원 시절이나 군대, 학창 시절 등으로 주제가 한정되어 있다 보니 지난번 술자리에서 들었던 얘기를 다시 들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술에 얼큰이 취해 자신이 같은 얘기를 이미 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지난번과 똑같은 얘기를 다시 반복하는데 전에 이미 들은 얘기라고 직장 상사에게 말하기는 부담스럽고, 대부분 처음 듣는 것 같은 표정으로 그 얘기를 다시 들어야 했다.


캐나다에 출장 왔던 모 임원의 군 복무 시절의 긴 무용담은 너무 자주 들어 전체 스토리를 거의 다 외우다 시피까지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다시 출장 와서 똑같은 얘기를 반복해 다시 들어야 하기도 했는데, 지루한 얘기가 지속되는 동안 계속 술까지 따라주고 건배하고 마시기를 강요하니, 이미 들은 얘기 다시 들어야 하는 정신적 고역도 고통이었지만, 몸에 좋지 않은 술까지 마셔야 하는 육체적 고통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나도 술을 좋아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오래 그리고 한꺼번에 많이 마시지 못한다. 그리고 부서 직원 또는 후배와 술 마실 때는 반드시 지켰던 원칙이 있었다.


첫째, 술 마시기를 강요하지 않았다, 아예 술을 따라 주지도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만큼 마시자고 했다.


둘째, 빨리 마시고 일찍 갔다. 1시간 아무리 늦어도 2시간 이내에는 항상 끝냈다. 2차는 물론 없었다. 후배나 부서 직원들이 나를 빼고 더 마시겠다거나 2차를 가겠다는 것은 굳이 말릴 수 없었다. 자유국가에서 퇴근 이후 그들이 어디 가는지를 내가 어떻게 좌지우지하겠는가? 계산하고 빨리 떠나 주면 후배들은 제일 좋아한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내게 잔소리 들었을 텐데, 퇴근하고 저녁에 또 몇 시간씩 그 상사를 보고 싶은 직원이 도대체 어디 있겠는가?  


셋째, 나 혼자 술자리 대화 독차지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부하직원들과 술 마시다 보면 나 역시 나도 모르게 혼자서 독백 같은 긴 얘기를 하게 되실수물론 있었지만 그런 상황이 감지되면 바로 중단했다.


말단사원 시절 술자리에서 상사로부터 시달리면서, 나중에 내가 혹 저 위치에 올라가면 절대 저것만은 하지 말아야지 하고 깊이 다짐했던 술자리 매너들은 내가 임원이 된 후에 모두 지켰던 셈이다.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말할 수도 있겠지만, 결코 그렇게 쉬운 것만도 아니다.


의도했던 바는 아닐지라도 어느 날 나의 모습되돌아보면 내가 선배로부터 괴롭게 당했던 것들을 그대로 후배들에게 되풀이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놀라는 경우가 사실 얼마나 많은가?


물론 나 역시 술김에 잘못을 범한 적도 있었다. 술김에 평소 쌓였던 감정이 표출되어 술자리에서 부서 직원을 심하게 나무란 적도 있었는데 그건 정말 잘 못된 행동이었다. 사실 '술김'이라는 표현 자체가 책임 회피적 용어이고,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부터 문제가 있다.


한 가정의 가장, 누군가의 남편이고 아들이고 아버지인 한 인간의 잘못을 지적하려면 근무시간 중 맑은 정신에 너무나 조심스럽게 해도 때로는 명확히 의사전달이 되지 않을 텐퇴근 후 술자리에서  취한 상태에서 그렇게 했다는 것은 문제 지적이 아니고 화풀이나 넋두리 아니면 술주정밖에 안 될 것 같다.


나 역시 너무 힘들고 내 위 조직 상사들로부터 그런 식으로 압박을 받다 보니 그랬던 것 같은데, 내 상사가 내게 그렇게 했다고 나부하직원들에게 똑같이 해도 된다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길에 침 뱉는 사람이 많다고 나도 뱉어도 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도 직장 생활 중 참 많은 실수와 과오를 저질렀던 것 같다.



 

술을 좋아하긴 하지만, 남들처럼 오래 많이 마시지 못했던 나로서는 사원 시절 술자리가 너무나 길어지거나 너무 힘들 정도로 술 마시기를 강요당하면 최후의 방법으로 술 마시다 그냥 집으로 가 버리는 당시로서는 꽤나 용감하고 무모했던 선택을 하기도 했었다.


먼저 가겠다고 말해도 통 보내주지를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그냥 화장실 간다고 하고 나와서 집으로 와 버렸던 것이다. 물론 그 용감한 행동의 결과로 인한 피해참혹한 경우가 많았는데 심지어 단지 그 이유만으로 최하위 고과를 받았던 적도 있었다.


요즘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 시절 내가 이유를 전혀 묻지도 않았는데 상사가 먼저 나를 불러 평가가 좋지 않은 이유가 술자리에서 도망갔기 때문이라고 매우 친절히 알려주던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술자리에서 도망갔다가 두고두고 회의 때마다 상사로부터 혼난 적도 있는데, 내가 도망간 것이 그 상사에게는 얼마나 사무치는 일이었는지 회의하다 뭔가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1년도 넘은 과거 일임에도 갑자기 내가 도망갔던 그날 일로 화제가 바뀌었다.


회의 내용이주제와는 전혀 관계없이 갑자기 "그런데 너 그날 왜 도망갔어?"라는 질책이 그 사건 이후 몇 년간이나 반복되어 꽤 고생을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분으로부터는 그래도 업무적으로는 인정을 받아서 신입사원 시절 만났던 그 상사와는 달리 인사 평가도 매우 잘 받았고, 그 덕에 이후 캐나다에 주재 발령도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술을 오래 못 마시는 것을 익히 잘 아는 동료들은 내가 술 마실 때 화장실에 가는 등 이유로 잠시 자리를 비우면 내 양복 상의를 숨겨 놓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개의치 않았다. 술자리가 너무 길어지면 양복 상의 없이도 그냥 집으로 도망갔다. 물론 다음날 출근해 보면 그 양복은 회사 내 자리 의자에 걸려 있었다. 동료들이 내 양복 상의를 버려두고 올 만큼 무책임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군 복무 시절 배치받은 부서에서 장교들끼리 첫 회식을  때였다. 대대장 주관 하 4~5명이 회식을 했는데, 술자리가 너무 길어져서 먼저 가겠다고 했더니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너무 힘들고 머리까지 아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결국 잠시 화장실 다고 하고 그대로 장교 숙소로 돌아와 버렸다.


다음날 선배 장교가 잠깐만 밖으로 나오라고 해서 갔더니 전날 술자리에서 내가 먼저 가버린 것을 지적하며, 얼차려 시키고 난리법석을 떨었다.


그런데 그 후에도 또다시 회식장소에서 먼저 간다고 했더니 역시 안 된다고 하길래, 이번에도 화장실 갔다 온다고 하고 또 도망갔다. 물론 다음날도 다시 얼차려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세 번째 회식하러 가서 화장실 갔다 다고 했더니 이번에는 대대장이 조용히 나를 쳐다보며 "그래 이소위 잘 들어가라"라고 먼저 얘기를 했다. 이후 술자리가 길어지면 나는 도망갈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먼저 간다고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래도 뭐라고 하는 사람 없었고 다음날 얼차려도 없었다.


사실 나는 고등학교 때 아버님 앞에서 술을 배웠다. "너도 이제 컸으니 술 마셔라"라고 하셔서 아버님 면전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버님은 그 때나 그 후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 단 한 번도 내게 술을 따라 주신 적이 없었다.


아버님은 술은 몸에 좋은 것도 아니고 취하면 실수를 하게 될 수도 있으니, 네 판단과 네 책임하에 네가 마실 수 있을 만큼 스스로 따라 마시라고 하셨다. 아버님 스스로도 한국 사회에서 생활하시면서 당연히 그렇게 자작(自酌)을 하지 못하셨겠지만, 자식에게만은 당시 한국에서는 참 기대하기 어려운 특이한 주도(酒道)를 가르쳐 주셨던 셈이다.




되돌아보면 그간 내가 마셨던 술도 거주하던 국가별로 모두 달랐다. 한국에서는 당연히 소주를 많이 마셨지만 Paris와 홍콩에서는 한국 식당에서 된장찌개를 먹으면서도 무조건 포도주를 마셨고, 베이징에서는 항상 백주 진류푸(金六福), 타이베이에서는 고량주 진먼까오량(金門高粱)을 마셨다. 그리고 토론토에서는 양주 시바스 리갈(Chivas Regal)을 마셨다.


토론토에서도 시바스 리갈은 절대로 저렴한 술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비싼 술도 아니어서 수입관세가 높은 한국에서 보다는 저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외부에서 술을 마시면 집으로 운전해서 올 수가 없으니 출장자가 온 경우 등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에서 보다는 주로 집에 도착해서 저녁 식사하면서 반주로 술을 함께 마시는 경우가 많았는데, 때로는 위층의 한국인 주재원과 또 때로는 집에 출장자를 데려와서 함께 마시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혼자서 마시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주말에는 집에서 혼자 마시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다른 나라에서와 달리 토론토에서는 술 구매하는 것이 좀 번거로웠다. 한국에서처럼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마트나 슈퍼 아무 곳이나 가면 술, 식품, 담배 등등 거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살 수 다. 하지만 토론토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술에 대한 규제가 심해서인지 술은 Liquor Store라는 주류 판매가 허가된 별도의 매장에 가야만 구매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통상 주말에 한 번 장 보러 나가면 차를 고서 한국식품 매장, 캐나다 슈퍼마켓, 그리고 Liquor Store 등 적어도 이렇게 최소 3군데 매장을 거쳐 이동하고 주차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장보기를 완전히 끝낼 수 있었다. 매장들도 땅이 너무 넓어서 그런지 한 군데 몰려 있는 것도 아니어서, 차를 타고 10~20여분 정도 운전하고 가야 다른 매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주 다녔던 집 근처 Liquor Store)

https://goo.gl/maps/kJRaD21TmnUnX9Xr5


(주말마다 장 보러 다녔던 한국 슈퍼)

https://goo.gl/maps/6yUkkYK2Rkn8wEzJ6


저녁에 담배나 술이 필요한데 집에 없다면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차에 시동을 걸고 밖으로 나와 담배와 술 각각 최소한 2개 매장을 돌아다녀야만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만 할 때는, 집에서 대충 걸어 나와 5~10분 정도만 걸어서 갔다 오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한국에서의 생활 그립기도 했었다.


담배 피우고 술 마시는 사람들은 이해하겠지만 담배나 술이 갑자기 떨어지면 더 절박하게 그것을 찾게 된다. 배고픈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중독성이 있어 그런지 술이나 담배는 그것이 근처에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오히려 간절히 생각이 난다. 더욱이 한밤 중에 술이나 담배가 생각나는데 집에 재고가 없다면 그 시간에 문 연 가게도 없으니 나가서 사 올 수도 없어 더더욱 낭패다. 그러다 보니 집안의 담배나 술 재고상태는 수시로 점검하곤 했었 한번 그것들을 사러 나가면 한꺼번에 왕창 구매해서 집에다 쌓아 두곤 했었다.


물론 이제 담배는 완전히 끊은 지 이미 10년이 다 돼 가고, 술도 양주 같은 독주는 안 마시고 와인만 마시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고 집구석 한편에는 항상 시바스 리갈과 담배가 전시 비상식량처럼 가득히 비축되어 있었다.




혼자 살다 보니, 집안에 가구라고는 원래 집주인이 설치한 것들 이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부엌에도 집주인이 설치해 둔 큰 식탁이 있었지만 TV를 보며 저녁을 먹을 때는 보통 응접실에 있는 TV 앞에 라면 Box를 갖다 놓고 바닥에 앉아 그것을 식탁처럼 사용하면서 식사했다.


간혹 출장자들을 집으로 데려와 같이 식사하는 경우, 김치 국물 같은 것까지 배어 있는 라면 Box가 TV 앞에 덜렁 놓여 있는 것을 보고서 그 용도를 의아해하다가 그것이 식탁으로 사용되는 것을 알고는 모두 놀라곤 했었다.


집에 들어와서 보면 응접실에 소파도 없이 달랑 TV 한 대와 그 앞에 김치 국물로 얼룩진 라면 Box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벌판 같은 장면이 펼쳐지는데, 이처럼 집안에 살림살이는 거의 아무것도 없는 반면 응접실의 한 구석에는 비상식량처럼 잔뜩 비축해 놓은 시바스 리갈과 담배가 쌓여 있고 현관에는 시바스 리갈 빈 병이 가득했으니....


현관에 빈 술병이 그렇게 많았던 이유는 사실 하루 이틀에 그 많은 독한 양주를 다 마셔버린 것은 결코 아니었고, 버릴 때 모아서 한꺼번에 버리려고 현관에 모아 두었던 것이다. 당시 토론토에서는 요즘의 한국만큼 분리수거가 강하게 시행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유리병만큼은 이미 분리수거제도가 나름 시행되고 있어서 일반 쓰레기와 함께 버리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 보니 술병을 모아 한꺼번에 버리려고 쌓아 두었던 것이다.


그때 미시소거(Mississauga)의 내 아파트를 방문했었던 출장자들은, 우선 밖에서 보이고급스럽고 멋진 아파트를 보고 너무 부러워했고, 집 안으로 들어와서는 그렇게 멋진 고급 아파트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안 어울리는 가구나 장식 하나 없는 텅 빈 폐가 같은 황량한 집 내부와 TV 앞의 김치 국물 묻은 라면 Box, 그리고 현관에 수북이 쌓여 있는 빈병 등을 보고 놀라곤 했었다.  


(내가 거주하던 아파트)

https://mysquareonecondo.ca/Mississauga/park-mansion-condos


그때는 그렇게 살았다. 먼 타향 광활한 캐나다에서 가족도 없이 살면서 특히 더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던 주말에는 창 밖 Mississauga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시바스 리갈을 반주 삼아 취기로 쓸쓸한 저녁을 달래곤 했었다. 고독하고 외로운 만큼 담배와 독주를 입에 달고 살았던 시절이었다.




몇 달간 청소를 제대로 안 해 먼지가 푹푹 쌓여 있는 응접실 카펫 위에 라면 Box를 식탁 삼아 술과 안주를 올려놓고 TV 보면서 먹고 마시다가 취기가 올라 바닥에 머리를 대고 누우면 카펫에 축적된 묵은 담배연기와 퀴퀴한 먼지 냄새가 물씬 느껴졌다.


그리고 컴컴한 응접실에서 오로지 빛을 발하던 TV 화면  사이로는 카펫의 먼지들이 모락모락 아지랑이처럼 피어 올라가는 모습이 취기와 잠결에 취한 눈가를 스쳐가곤 했었다.


그렇게 잠에 들곤 했었다. 그러다 아침에 눈 뜨면 기계처럼 회사로 달려가 하루 종일 악악 대고 박박 싸우다가 저녁에 다시 집에 돌아오면 또다시 그렇게 잠들고, 다음날 또다시 일어나고.... 힘들고 외로웠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그 귀한 시간을 그렇게 허망하게 보냈어야만 했을지....


그런데 만일 과거로 돌아가 그 시간을 다시 한번 살 기회를 신이 내게 부여한다면, 이번에는 과연 전과 다르게 정말로 후회 없는 삶을 제대로 살 수 있을지, 왠지 반드시 그럴 수 있다 답할 자신이 여전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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