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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T Nov 30. 2019

북미에서 20년 만에 만난 동창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2편 Toronto-16)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Toronto



16. 북미에서 20년 만에 만난 동창


나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공군 학사장교에 지원해서 당시는 대전에 있던 공군 교육사령부에서 3년 반 군대생활을 했다. 하지만 원래 계획은 미국이나 유럽으로 유학을 가서 심리학 혹은 언어학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유학을 위해 군입대 영장 발급이 좀 더 연기될 수 있도록 대학원에 입학하고 등록금까지 납부했었다.  


다만, 혹 갑자기 군대 가야 하는 부득이한 상황이 발생할지 몰라 늦은 나이에 사병으로 가기는 좀 그래서 장교 시험도 일단 봐 두기는 했었는데, 그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한다는 차원에서만 응시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바로 그 만약의 경우에 대비 준비해 두었던 학사 장교로 급하게 입대하게 되었다. 그것도 대학원에의 입학과 함께 당시 '조교'라 불리던, 교수 방에 앉아 행정 보조하는 자리까지 어렵게 하나 얻어 놓고서 첫 출근하는 바로 그군대로 입대했 것이었다.




준비해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갑작스럽게 군대에 입대하게 된 유는 바로 한 여자 때문이었다.


그녀는 같은 동네에 살던 초등학교 동창이었데, 초등학교 시절부터 워낙 세련되고 예뻐서 나 포함 많은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중고등학교를 거치며 연락이 끊겨서 어렴풋한 추억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대학 졸업할 때쯤 우연히 연락되어 다시 만나게 되었다.


어린 시절 동네 친구이고 부모님도 서로 아는 사이다 보니, 별다른 부담 없이 다시 만날 수 있었는데 그렇게 만나던 중, 어릴 부터 갖고 있던 속마음을 어느 날 그녀에게 과감히 고백하고 친구가 아니라 결혼까지 고려하관계로 사귀고 싶다고 말했다.


나로서는  많은 시간을 고민해서 어렵게 한 그 말에 대한 그녀의 반응은 의외로 너무나도 쉽고 간결했다. 웃으면서 하는 말이 내가 너무나 어리다는 것이었다. 학교 동창이니 우리의 나이는 당연히 같았는데, 그녀는 적어도 몇 살 정도 나이가 많은 더 성숙한 남자를 배우자 이상형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그 고백 이후 내 희망과는 정반대로 그녀와의 만남은 꼬여갔고 더 이상 만나기가 불편하되어버렸는데, 그러던 중 그녀가 우리 학교 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던 그녀가 통역대학원으로서는 꽤 알려진 우리 학교 동시통역대학원에 진학을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학교는 교정이 매우 작은 편이라,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니게 되면 교내에서 서로 마주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는데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만 하는 그녀와 다시 교정에서 자주 마주치는 것이 나로서는 꽤 부담되었고  두렵기까지 했다. 그녀가 좀처럼 잊히지 않았던 상황에서 그녀와 빈번하게 마주치게 되면 그녀를 잊으려는  노력이 실패하고 오히려 고통만 더 커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우려했었던 일이 내가 조교로 첫 출근한 바로 그날 실제 발생해 버렸다. 겨울이 지나고 따스한 온기가 캠퍼스 여기저기 퍼지기 시작하던 햇살이 찬란한 초봄이었다. 교수 방에 처음 출근해보니 쓰레기통이 없길래 학교 앞의 시장에 가서 쓰레기통을 하나 사다 놓고서 잠시 창문 밖 봄 경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그때 노란 개나리꽃으로 온통 뒤덮인 '미네르바'라고 불리던 교정 언덕길 아래로 그녀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이런 식으로 그녀를 교정에서 반복해서 마주쳐야 한다면 그녀를 잊기는커녕 오히려 그녀 생각만 더욱 하게 되고 자제할 수 없는 감정으로 인해서 내 고통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어서 어딘가로 빨리 도망가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공교롭게도 그날이 마침 유학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을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응시해 두었던 학사 장교에 입대하는 날이었다. 물론 아침 일찍 대전의 부대에 입대해야 했으므로, 12시가 넘은 그 시간에는 이미 너무나 늦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볼 수 없는 곳으로 도망갈 곳은 군대밖에는 없다는 신념, 늦었지만 일단 한번 가보기로 하고 서둘러 집에 가서 짐을 싼 후 어머님께 군대 간다고 말씀드렸다.


아침에 학교에 간다고 나갔던 아들이 점심때쯤에 정신없이 들어오더니 갑자기 1박 2일도 아니고, 1달도 아닌, 3년 반 동안 떨어져 살아야 하는 군대에 간다고 말하니 어머님은 당연히 너무나 놀라셔서 나를 바라보시기만 하시고 별다른 말씀조차 못하셨다.


저녁에 집에 돌아오셔서 소식을 들었던 아버님도 또한 같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아침에 학교 간다고  아들이 저녁에 집에 돌아와 보니 군대에 갔다고 하니....


어쨌든 그렇게 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대전에 도착해, 다시 택시 타고 유성 방면으로 가는 길에 있는 부대를 찾아갔다. 해 질 녘쯤 부대 정문에 도착해 정문의 헌병에게 오늘 아침 입대해야 하는 사람인데 좀 많이 늦기는 했지만 지금이라도 들어갈 수 있냐고 물으니, 어딘가 전화해서 확인해 보더니 들어가라고 했다.


그런데 들어가서 군복으로 갈아입을 때 보니 주머니에 교수 방 열쇠가 있었다. 경황이 없어서 교수 방 열쇠까지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나중에 수도 없이 들은 얘기지만, 당시 그 교수는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출근을 해 보니 교수 방 문은 잠겨 있고, 들어가 보니 못 보던 쓰레기통 하나가 달랑 놓여 있는데 정작 출근 첫날인 조교는 아무 연락도 없고 하루 종일 보이지도 않더니 며칠 후에는 열쇠까지 갖고 군대 입대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정말 속된 말로 '또라이''미친놈'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입대하고 나니 이제 마음대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녀 생각이 간절히 나기도 했지만, 그렇게 부대에 갇혀 있으니 결국 내가 원하던 대로 그녀를 볼 수도 만날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래도 숨 헐떡이며 구보하거나, 비 내리는 날 행군할 때는 방탄모 아래 땀과 빗물 사이로 그녀의 모습이 하염없이 또 어른거리는 것은 솔직히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만날 기회는 내가 원하던 그대로 원천적으로 차단돼 버렸고, 그런 면에서 입대를 결심한 당초의 목적은 너무도 확실하게 달성된 셈이었다.


지나고 보니 그렇게까지 과격하게 군대에 입대하면서까지 그녀와의 조우에서 꼭 도피해야 할 이유가 있었나 싶기도 하다. 이제는 내가 생각해도 우습게까지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되돌아보니 그렇다는 얘기이고 그 당시 23살의 피 끓는 젊은 청년의 충동은 지금과는  달랐다.


3년 반 군복무후 제대한 뒤에는 유학을 다시 준비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것 같아서 대학 졸업할 즈음 입사시험 보고 합격했던 직장으로 복직해 그 직장을 계속 다니다 몇 년 전 마침내 퇴직했다.


결국 그날의 로 그 군 입대 결정으당초 내가 계획했던 인생이 아닌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셈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후회를 하지는 않았다. 군입대로 바뀐 내 인생도 내가 선택한 인생이고,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 인생 경로를 그렇게 통째로 바꾸어버린 바로 그 초등학교 동창을 그 일로부터 약 20여 년의 세월이 지나서 다시 만나게 되는 일이 있었다. 그것도 한국에서도 아니고 캐나다 주재 기간 미국에서....


그녀는 미국 동부에 살고 있었는데, 뉴저지에 있었던 우리 회사 북미 본사에 출장 갈 일이 있을 때 만나게 되었다. 물론 영화처럼 길에서 지나가다 우연히 만난 것은 아니었고, 한 때 유행했던 동창 모임 사이트를 통해서 동창들과의 연락이 기 시작하면서 그녀와도 다시 연락이 닿아 만나게 었던 것이다.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니, 그녀는 내가 입대한 후 얼마 있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현재의 한국 교포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정착하게 되었다고 했다.


20대 초반에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녀를 20여 년이 지나서 미국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우리는 모두 40대에 들어선 나이였는데 두 명의 자녀가 있다는 그녀의 미모는 세월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예전과 다름없는 것 같았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처음에는 잠시 어색했지만, 이내 그녀와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져 갔고 연애인지 아닌지 애매한 그러한 만남을 이어가던 20대 젊은 시절의 얘기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런데 그녀는 그때 내가 그렇게까지 자기를 좋아했는지 몰랐다고 했다. 만일 그렇게 좋아했다면 좀 더 적극적으로 다시 얘기해 보지 왜 군대로 도망갔냐고 웃으면서 얘기를 하는데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가 없었다.


되돌아보면 내가 너무 일찍 스스로 포기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미 결혼해서 다른 남자의 부인, 그리고 두 자녀의 엄마가 되어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그런 생각 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제는 그저 각자의 인생에 충실하고 각자의 삶을 더 풍족하고 의미 있게 사는 것에 최선을 다하면  것이다.


때나마 "우리는 연인이었다"라고 조차도 말하기가 애매한 그녀지만, 어쨌든 그렇게나마 아주 오래전 유년시절 친구인 그녀를 다시 만나 보고, 젊은 시절 추억의 얘기를 다시 할 수 있었으니 이미 그걸로 충분히 만족하고 즐거웠다.




그날 그녀를 만날 때, 역시 미국 동부에 거주하는 다른 남자 초등학교 동창도 같이 만났다. 그 친구가 집으로 초대해서 그날은 그 친구 집에서 자기로 했는데 저녁 식사 분위기가 무르익자, 자신이 미국으로 이민 오게 된 이유 중 하나이며, 지금도 너무나도 큰 상처로 기억하고 있는 사건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사건은 당시 어린 나이에 너무 놀라서 나 역시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바로 그 사건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그랬는데, 뭔가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었는데, 남자 선생이 그 친구에게 책상 위로 올라서라고 하더니 그 친구가 올라서자마자 여학생들도 있는 교실에서 그 친구 바지를 갑자기 아래로 확 잡아 벗겨 버렸다. 당연히 생식기까지 노출되었고 나 포함 아이들은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두 어안이 벙벙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때 그 선생이 짓던 얼굴 표정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어린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이 판단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표정이긴 했지만, 벌게진 얼굴로 묘한 웃음을 지우던 그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그 장면 앞 뒤는 이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순간만은 한 장의 또렷한 사진처럼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런데 당사자도 아니고 현장을 목격하기만 했던  기억도 그렇게 선명한데, 그 일을 직접 당했던 당사자의 기억이야 오죽했겠는가? 이제 두 딸의 아버지가 되어서도 30여 년 전의 그 사건을 정말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 굳이 다시 꺼내야만 하는 그 친구의 상처는 얼마나 깊었을지....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이름이 다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 선생 이름은 지금도 분명히 기억난다, '조OO'. 그가 왜 그런 해괴한 행동을 어린아이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했는지 여전히 잘 모른다, 아니 도통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어떤 경우의 수도 선생이 그것도 교실에서 다수의 학생들이 보고 있앞에서 갑자기 한 학생의 바지를 벗기는 상황으로는 도무지 연결이 되질 않기 때문이다.


필경 성적 장애나 결함이 있는 선생이었던 것 같은데, 런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하고서도 교단에 서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 일을 계속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게다가 오히려 피해를 당한 학생이 한국을 떠나서 살아야 하는 것 또한 이해가 안 된다.


언론 기사를 보면 요즘도 학교에 그런 꽤 이상한 선생들이 전혀 없지는 않은 것 같다. 불완전한 인간들모여서 사는 세상이니 그런 문제는 세상 끝이 올 때까지는 변함없이 반복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문제가 있는 사람을 찾아내고 격리해서 두 번 다시 그런 자리로 돌아가 똑같은 짓을 반복하지 못하게 하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해야 할 것 같다.


그 친구는 미국 유명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었는데 그런 아픔을 갖고도 미국까지 와서 훌륭한 교수로 성장하고 자리 잡았으니 참 고마운 일이다.


반면 그러한 악행을 저지른 그 선생은 동창 모임과도 전혀 연락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이후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 혹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선생이라는 인간이 어린 학생에게 그런 짓을 해서  인간에게 평생 깊은 마음의 상처를 남겨 주었으니, 만일 이 세상에서 그 벌을 다 받지 않았으면 사후 세상에서라도 그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국에 통 오지 않는 두 명의 초등학교 동창, 그것도 너무나 친했던 두 친구들을 미국 출장길에 오랜만에 만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는데, 그때의 그 만남이 수십 년만의 처음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이다.


이후 다시 그 친구들을 만나보게 될 기회는 없었는데, 내가 북미로 다시 갈 계획도 없고, 그들 또한 도통 한국에 오지를 않으니, 어쩌면 앞으로도 더 이상 만나보지 못하고 그때의 만남을 마지막으로 이번 생을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린 시절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 비슷한 고민들 공유했던 오랜 친구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어디에 있든 모두가 행복하고 축복받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원한다.


초등학교 졸업 당시 학교 모습.
2014년 11월 초등학교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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